[어제와 오늘] 스탈린과 도청


미국 대사관이 4대문 밖인 용산의 캠프 코니어로 이전한다. 만약 21세기가 미ㆍ소 대립의 냉전 시대라면 미국은 결코 이전 하지 않을 것이다. 4월 30일자 중앙일보 ‘서울 라운지’라는 코너는 2004년의 세계 속에는 19, 20세기에나 걸맞는 ‘역사의 풍경’이 잔영으로 짙게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 러시아 대사관은 2001년 9월 30일 삼성물산을 통해 골조 공사를 끝냈다. 그러나 공사 내내 보안담당관이 상근하면서 시멘트 섞는 것까지 감시했다. 9월 30일 이후에는 러시아 기술자들이 내부 마감 공사를 맡았다. 이때에도 보안요원 10명이 모든 건축 자재를 샅샅이 검색했다. 도청 장치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복사기가 고장 나도 기술자를 대사관 안으로 부르지 않고 밖으로 운반해 철저한 보안 속에 수리한 뒤에 다시 반입할 정도로 러시아 대사관의 보안 의식은 투철하다.”

그렇게 지킬 게 많을까. 올해 80세가 되는 스탈린 시대 비밀 경찰의 총수였던 라벤트니 베리아(1953년 12월 총살됨)의 아들 세르고(미사일 개발자, 물리학 박사)가 쓴 ‘베리아-나의 아버지 : 스탈린의 그렘린궁 내막’에는 자본주의와의 대결을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가 고안해 냈던 도청이란 게 얼마나 편협했던 지가 묘사돼 있다.

1943년 12월, 당시 소비에트 외국어 아카데미에 다니던 세르고는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고 비행기에 실려 내렸다. 모스크바에서 11월에 있었던 미ㆍ영ㆍ소의 외상회담의 논의 사항을 3거두(루즈벨트, 처칠, 스탈린)가 추인 하기 위해서 정상 회담이 열렸기 때문. 그 때 세르고에 주어졌던 임무는 소련의 점령지역인, 루즈벨트가 머무는 곳에 도청 장치를 미리 설정하고 처칠과 루즈벨트간의 대화를 매일 스탈린에게 보고 하는 것이었다.

같은 그루지야 출신이었던 스탈린의 집안과 베리아가는 서로 친숙했다. 스탈린은 인사 치레로 세르고에게 말했다. “그대 어머니는 어떠신가? 다니는 아카데미에는 기술적으로 완벽한가?”이 뒤에는 물론 중요한 이야기가 따랐다.

“내가 너를 데려 온 것은 미묘하지만, 도의적인 면에서는 이해 될 수 있는 임무를 주기 위해서다. 곧 이곳에 올 루즈벨트가 처칠과 나눌 대화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내가 너에게 이 임무를 주는 것은 이제 구성될 제 2전선 구축(소련이 동쪽, 미ㆍ영이 서쪽 유럽을 맡아 독일을 점령하는 전선)에 처칠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두 사람과 그 보좌관들간의 대화를 미리 꼼꼼히 알아야 한다.”

세르고는 스탈인이 ‘도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임무’로 도청을 한다는 데 이해가 힘들었다. ‘차라리 나라를 위해서’라고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세르고를 불러 두 사람 대화의 분위기, 억양, 감정에 대해서까지 물었다. “그래 루즈벨트가 그런 것에 동의를 했단 말이야? 우리가 도청하는 걸 아는 건 아닐까? 어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도청을 알고서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까?”세르고는 “소비에트의 기술로는 도청을 여부를 알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스탈린은 이 도청 덕으로 그를 루즈벨트와 둘이서는 욕한 처칠이 칭찬에 나서면 비웃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도청으로 처칠의 태도를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

예일대학에서 냉전의 역사에 대한 귄위를 인정 받아 석좌 교수로 있는인 존 루이스 개디스(‘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 ‘역사의 풍경’의 저자)는 지난 3월에 나온 ‘기습 공격, 국가안보, 그리고 미국의 경험’에서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다. “스탈린의 이런 동맹국에 대한 스파이 행위는 그의 편협한 인격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루즈벨트 사후, 베를린 벽이 무너지기까지 50년 냉전의 원인이다”고.

개디스 교수는 “스탈린은 루즈벨트가 죽은 후 그가 전후에 구상한 세계의 다변화 대신 미ㆍ영이 소련을 사전 공격해 고립시킬 것이라는 신념 속에 유럽의 반을 50년 동안 소련의 영향권 아래 두는 공산제국의 신념을 세웠다”고 부연했다. 그는 “스탈린은 1942년 미ㆍ영이 원자탄 공동개발에 나서자 미국에 스파이망을 조직, 이 정보를 얻으려 했다. 또 테헤란에서 미ㆍ영이 노르망디 상륙을 미루고 이탈리아에게서 비밀 항복을 끌어 낸 것은 처칠의 소련 봉쇄”라고 생각했다

이런 스탈린의 의심은 그가 공산주?이岳?철저한 것이기보다 기질의 잔혹성, 편협성 때문이라고 개디스 교수는 보고 있다. 실제로 그는 파이프를 물고 생각에 잠겨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바닥에 침을 뱉는 자신의 모습을 크렘린궁에서 기르는 앵무새가 흉내내자 즉시 새장으로 달려가 앵무새의 머리를 파이프로 때려 죽였다. 그는 크림반도에 휴가 갔을 때 개가 짖어대는 바람에 잠을 설치자 이웃 맹인이 기르던 맹인 안내견을 총살했고 맹인 농부를 굴라크(강제노동소)에 보냈다.

개디스 교수는 20세기에 지도자 개인의 삶과 그 개인의 도덕을 시대에 강조한 세가지 사례를 들었다. 히틀러(유태인 학살, 2차 세계대전), 마오쩌둥(3천만을 집단 농장에서 아사시킴), 스탈린이다. 스탈린의 정치, 경제적 편집성은 1,400만명의 농부가 집단 농장에서 굶어 죽게 했다. 개디스 교수는 그건 공산주의 이념도, 나치즘의 사상도, 모택동주의의 실용도 아니라 개인의 도덕, 기질, 인격을 인민들에게 강제한 것이다고 결론 내렸다.

러시아가 서울에서 그렇게 도청 방지에 진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이 대사관은 4대문안에 있어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서로 일맥상통할 지 모른다.

입력시간 : 2004-05-2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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