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레이건의 전두환 달래기


1987년 6월 18일. 미국 남부 출신의 우직함을 지닌 루이지애나 출신 해리 던롭 주한 미대사관 참사관은 전화에 대고 고함을 쳤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 대사를 만나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다고 생각치 않는다. 전 대통령은 그런 결정을 내릴 바보가 아니다. 제기랄! 지금 당장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의 이름을 알고 싶다.”

제임스 릴리 대사는 86년 11월 서울에 온 후 6월 17일 지방에 있는 미국문화원을 둘러보고 있던 터라 서울에 없었다. 던롭은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가 오늘 밤 서울에 도착 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대사가 직접 전 대통령에게 전할 수 있도록 일정을 상의 하겠다는 것이었다.

릴리는 ‘레이건의 친서’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주미 한국대사인 김경원은 6월 10일 이후 시작된 한국의 중산층과 대학생이 일으킨 민주화 운동의 해결 방안에 대해 릴리와 몇 차례 의논했다.

두 대사는 의견을 같이 한다. 80년 5월의 광주항쟁에 대한 군부 무력 개입이 서울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레이건 대통령이 친서를 전 대통령에게 보낼 것, 이 편지는 릴리 대사가 느낀 서울의 현황과 함께 직접 전 대통령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에는 담당 차관의 의견이 깊이 개입됐다.

던롭이 고함을 지른 후 최광수 외무부 장관으로부터 막 서울에 도착한 릴리 대사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은 면담이 안되고 19일, 금요일 하오 2시로 시간이 잡혔다”는 것이었다. 19일 오후 2시에 최광수 장관을 통역으로 세 사람만의 면담이 시작됐다. 이날 전 대통령은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부드럽게 편지를 시작하고 마지막에 전 대통령을 달래는 것으로 끝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가끔 말하는 것처럼 올바른 민주정체 속에서만 정치적 안정이 있고, 그것은 장기적 국가안정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당신이 내년에 대통령직을 이양하겠다는 공약은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전례가 없는 역사적인 것이며 민주정체를 강화하는 길입니다.”

“자유 언론과 공평한 TVㆍ라디오의 취재는 공정 선거를 위한 필수조건 입니다. 대화, 합의, 협상은 문제를 푸는 효과적 방법이며 국민을 단합시킵니다. 나는 당신에게 보장합니다. 당신이 이 길로 나아갈 때 말입니다.” 그는 덧붙였다. “1988년 대통령직을 떠나면 부부가 함께 미국에 오십시오.”

릴리는 전 대통령에게 편지의 뜻을 설명했다. “현재 사태는 심각하다. 레이건 대통령의 말은 애매하지 않고 단호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계엄령 선포에 반대한다는 것이며 주한 미국도 무력 사용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이다. 만약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계엄령을 선포한다면 나는 ‘1980년 광주’의 가공할 결과가 다시 나올 것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최 장관은 청와대를 나오며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다”고 예견했다. 저녁 무렵에 최 장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계엄령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다”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계 미국인 여비서는 릴리와 던롭의 목을 껴안았다. 던롭은 “고함을 질러 댄 것이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고 자평했다.

조지 슐츠 미 국무부 장관은 88년 12월 레이건 정부를 떠나면서 릴리 대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은 한국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지 않도록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만약 이 일이 당신의 설복없이 이뤄졌다면 한미 관계는 재난을 겪었을 것이다. 미국이나 당신 개인에게 그 일은 자랑이다”고 썼다.

이상은 지난 5월 4일 릴리가 그의 언론인 아들인 제프리와 함께 펴낸 ‘차이나 핸드(전문가, 숙련가) – 90년간의 아시아에서의 모험, 첩보, 외교’에 나온 87년 6월 10일~29일까지의 일을 쓴 그의 회고록을 재구성 해본 것이다.

릴리의 한국 재임은(86~89년) 짧았지만 릴리 집안과 한국과의 인연은 길었다. 그는 1916년부터 중국에서 스탠드 오일의 칭타오 지역 판매 지배인을 한 프랭크 월터 릴리의 막내 아들로 1928년에 칭타오에서 태어났다. 그가 그의 인생의 표본으로 삼은 큰형 크랭크는 1932~1936년 사이 평양 외국인 학교를 다녔다. 그가 막내인 릴리에게 보낸 숱한 편지에는 암울했던 일제하의 한국이 그려져 있다.

릴리는 1950년 6월 25일 미네소타의 한 옥수수 농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이 예일대 러시아 및 영어 전공 학사인 그를 CIA에 지원케 해 ‘차이나 핸드’에 더해 ‘코리아 핸드’가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입력시간 : 2004-06-2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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