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아버지와 딸


‘국가 정체성’ 논란의 불을 지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8일, 전직 대통령 방문의 첫 순서로 최규하 전 대통령을 찾았다. 국정 현안과 정체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 대표는 정체성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여권이 그와 무관한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전력과 유신독재를 시비 삼는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박 대표에게 아버지 박정희는 현재의 정치적 위상을 확립하는 데 든든한 후광이 된 동시에 극복해야 할 어두운 그림자 또한 드리우고 있다. 특히 17대 국회 초반부터 여야간에 뜨거운 공방을 불러온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 문제가 8ㆍ15를 계기로 재점화될 것이 확실시 된 지금,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 시비는 또 다시 도마 위에 오를 전망이다. 박 대표는 유신독재에 대해선 분명한 입장을 나타냈지만, 아버지의 친일 전력 논란에 대해선 아직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박정희의 친일 시비에서 쟁점은 그가 일본의 만주국 군대의 소위로 있을 때의 행적이다. 박정희는 1942년 중국 창춘(長春)에 위치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 2기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사(제 57기)를 거쳐 44년 소위로 임관, 그 해 7월 만리장성 북쪽 열하성 흥륭현에 주둔한 만주군 보병 제8단에 배치돼 패망할 때까지 그 부대에 있었다. 이 부대의 상대는 중국 공산당을 이끈 마오쩌둥(毛澤東) 휘하의 팔로군이었다.

박정희 옹호론자들은 그가 관동군의 정보 장교로 직접 전투에 참가한 적이 없다거나 팔로군이 중공군이기 때문에 ‘친일’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중국에서 중공군과 조선독립군과의 관계를 잘못 인식한 데서 비롯된 오류다. 일제의 토벌로 41년 이후 무장 독립 운동이 어려워진 조선인들은 중공의 승리를 통해 궁극적으로 조선이 해방될 것으로 기대하고 중공군과 함께 항일전에 참여했다. 그래서 팔로군에는 중공군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독립 항쟁을 하던 조선인과 중국 남부에서 활약하던 조선 의용대가 있었다. 박정희의 만주군 전력이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군대를 탈출해 3ㆍ1운동에 참여, 만주로 가 독립 운동을 하고 광복군 총사령관이 된 지청천(池靑天) 장군과도 대비된다. 박근혜 대표가 만난 최규하 전 대통령은 만주국에서 관료를 양성하던 대동학원(15기) 출신이다.

여권이 박정희 대통령을 박근혜 대표에 오버랩시켜 비판하는 정치적 불순성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박 대표는 이제 ‘만주군 소위 박정희’에 대한 침묵을 깨야 한다. ‘아버지와 딸’이라는 개인적 숙명을 넘어 역사의 진실 앞에 서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때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4-08-12 17:17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