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거다 러너의 '파이어위드'


지난 주 ‘어제와 오늘’ 칼럼에서 존 허시는 원폭 1개월 후의 히로시마 중심가 풍경을 ‘Panic Grass(기장 벼)’ 와 ‘fewfew (여름 흰붓국화꽃)’로 표현했다. 특히 벽돌조각이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에 새로 돋아난 Sickle Senna(석결명꽃)가 번듯이 꽃밭을 이룬 모습을 “원자폭탄이 식클센나 꽃씨를 뿌린 것은 아닌가”로 표현했다.

미국 역사가협회장이었고 지금은 위스콘신대 역사학부 명예 교수인 올해 84세의 거다러너 박사는 82세의 나이에 ‘Fireweed(불탄 자리에 자라는 분홍 바늘꽃)-정치적 자서전’이라는 책을 썼다.

미국 정치에서 여성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11권의 여성 역사서를 저술한 미국 공산당 당원이기도 한 러너 박사는 왜 자전(自傳)의 제목을 ‘파이어위드’ 라고 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사람이 늙으면 자신의 인생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 꼭 어떤 결과나 관점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삶이나 정치적인 삶이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치적 자서전’이라 했다” 고 출간 후 인터뷰에서 밝혔을 뿐이었다.

그녀는 1958년 38세의 나이에 ‘남성이 쓴, 남성 중심의 역사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정치성’ 을 갖고 대학에 입학, 1966년 콜럼비아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얻었다.

19세이던 1939년에 미국으로 온 오스트리아 상류층 유대계인 그녀는 ‘파이어위드’에서는 세상에 알려진 역사학자로서 58년 이후를 쓰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서 배운 학생과 친지들에게 여성에 관한 역사학자로서 또 여성학 이론가로서 무엇을 기여 했는가를 실제적인 생활역사를 통해 알려주고 싶었다”고 속마음을 비쳤다. 그러나 그녀의 첫 책장에는 ‘파이어위드’ 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과 함께 제목을 단 이유를 넌지시 비치고 있다. “불탄 자리에 자라나는 풀이라는 이름의 일반성은 2차 대전 당시 런던에서 숱한 공습 후에 피어난 꽃이라는 것으로 더 알려졌다.”

“미국의 전래 전설에 의하면 파이어위드는 수림이 불탄 후 그 자리에서 다시 피어난 나무의 정령이라고 한다.”

그녀는 1938년 4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당시 약사였던 유태계 아버지와 예술가 성향의 유태계 헝가리 태생 어머니 사이에서 난 첫딸이었고 ‘5세기 동안의 독일민요’에 대한 것으로 대학 입학 자격시험 논제를 삼은 짐나지움 1등생이었다.

그녀는 같은 해 9월까지 아버지의 도피처를 캐묻는 나치 때문에 지급되는 빵의 반밖에 받지 못하면서 감옥에서 궁핍과 압제를 경험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간 약혼자의 초청으로 이듬해 미국에 왔다. 그러나 독일계인 적성(敵性)외국인으로 분류돼 주급 8~12달러를 받는 상품선전원, 중개인, X-레이 기사보조원을 전전하며 미국적을 얻으려 했다.

그녀는 1941년 약혼자와 파혼한 후, 미국인 영화편집자 칼 러너와 결혼해 1938년의 비엔나 감옥생활을 다룬 ‘감옥’을 가지고 소설가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비친 미국은 파시스트 독일을 패망 시킨 후 자신도 파시스트 국가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진주만 공습 후 일본인의 수용소 수용, 자신과 같은 유태계 나치 피해자를 적성외국인으로 취급하는 국가안전법 등등. 그녀는 소련이 비록 스탈린의 공산독재 하에 있지만 인간의 평등을 위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곳으로 받아들였다.

1945년 4월 그녀의 정치적 삶을 공산사회주의에 맞춘 그녀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사망에 아버지를 잃은 듯 울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 그녀는 ‘극렬 미국인’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독일에 가까웠다는 이유와 대일전에서의 미국 군인 희생을 줄이기 위해 16만명의 일본시민을 죽인 것은 나치 독일인들의 우월주의에 의한 학살과 근접하는 것이다. 전쟁을 단축시키기 위해 원폭을 사용하는 것은 미국의 도덕적 한계와 파시즘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나는 8월 6일과 9일 원폭투하로 냉전이 시작됐다고 본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공포는 여태 겪지 못한 것이다. 이 폭격은 모처럼 열렸던 세계의 도덕적인 지향을 공포와 테러로의 새 세계로 끌고 갔다.”

“나는 미국이란 새 나라에서 찾았던 내 귀속감과 안정을 1945년 8월 6일에 잃었다. 나는 히로시마 이후 정부정책의 반대입장에 서게 되었다. 정부의 공식언명을 지나치지 않고, 그 이유를 캐게 됐다.” 그녀는 ‘극렬 미국인’이 되어갔다.

그 후 그녀는 불탄 수림 속에 쏟은 ‘분홍 바늘꽃’처럼, 역사에서의 여성, 미국 역사에서의 여성 연구가로 다시 태어났다. 1969년에는 뉴욕의 버너드 여자대학에서 ‘여성사’를 첫 개설했다. 1972년에는 ‘백인 미국에서 흑인 여성’으로 미국 역사학회 저술상을 받기도 했다.

러너 박사의 주장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원폭 투하의 최고 책임자인 트루먼은 8월 9일 이후 어떤 원폭도 전쟁에서 사용을 금지하도록 했다. 1948년 베를린 봉쇄 때도 군부의 원폭 사용 건의를 물리쳤다.

그가‘식클센나’ 나 ‘파이어위드’까지 전멸시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입력시간 : 2004-08-1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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