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토미 프랭크스의 '미국 군인'


“토미, 당신은 두 번의 테러전쟁에서 우리 군대를 지휘했습니다. 당신의 용맹스런 부대와 올바른 전략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라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일한 것은 나의 행운입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2003년 7월 7일, 38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퇴역하는 중부사령관 토미 프랭크스 대장에게 손수 쓴 짧은 편지를 부시는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라는 말로 끝냈다.

프랭크스는 8월 초에 나온 590쪽의 회고록 ‘미군 군인’에서 덧붙였다. “…좋은 사람… 그리고 38년간 자랑스런 군인이었다”고. 이 회고록은 뉴욕타임스 논픽션 베스트셀러 1위를 2주째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 해 4월 16일, 개전 4주째인 이 날 바그다드 사담 후세인 궁에서 “연합군은 이라크를 점령하러 온 게 아니다. 우리는 해방군으로 왔다”고 이라크 국민에게 선언했다.

이어 그는 4월 말쯤 럼스펠드 국방장관에게 퇴역 의사를 전했다. “지금은 임무를 바꿀 때다. 전투에서 빠져나와 그 후의 작전(재건)을 논해야 할 때다. 이 작전은 수년이 더 걸릴 것이고 그렇게 오랫동안 나는 이 사령관 직을 계속할 수 없다고 본다.”럼스펠드는 5월 초 그에게 공석이던 육군참모총장 직을 제의했다. “추천은 고맙지만 거절해야만 한다. 나는 싸움꾼이지 지배인 같은 군인이 아니다. 나는 명예가 주렁주렁 달린 곳(워싱턴 정가 및 펜타곤)에서 잘 할 수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성경 갈피 속에 있던 토미 레이 벤트리의 출생신고서를 보고 “왜 벤트리냐”고 어머니께 물었다. “그건 의사가 잘못 기재한 거야. 토미 레이.”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에 가서야 입양아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회고록에서 아버지 레이와 어머니 로렌느를 줄곧 부모로 적고 있다. 그의 아버지 레이는 2차 대전에 항공정비병으로 참전한 퇴역군인이다. 특히 그는 기계 수리에 탁월하고 성실한 남부 미국인으로 토미 그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파이를 제일 잘 만들어 아들의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파이 장사를 하고, 남편 내조에 헌신적인 작은 키의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그려졌다.

프랭크스는 1963년 텍사스대학 화공과에 들어가나 2학년 첫학기에 성적 미달로 대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발길을 옮긴 곳이 군대였다. ‘오른발! 왼발!’의 구령. 사병, 장교 모두가 함께 나팔소리에 맞춰 경례하는 장엄함에 그는 “군인이 된 것이 장하다”고 느꼈다. 그는 67년 2월 사병에서 포병간부사관학교를 지원,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직업군인이 된 것이다. 대학교의 성적 미달생은 이곳에서 상위 10%의 성적을 얻었다.

그는 67년부터 18개월간 베트남에서 포병 관측장교로 최일선에서 전투를 했다. 3개의 상이기장, 5개의 무공훈장을 받은 장교가 된 것이다. 그가 베트남에서 배운 것은 “군인은 소속부대와 상관에 충성해야 한다. 지휘관은 그의 부하들의 완전한 지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69년에 결혼을 했고, 경영학사를 땄으며 73년 독일 베이루스 제2기갑연대 곡사포 중대장으로 첫 지휘관을 맡았다. 그리고 91년 별을 달고 1차 걸프전에 1기갑사단 작전참모를 지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다섯 살 때였다. 가난한 아버지 레이가 장난감 집짓기 토막을 만들어주며 한 말에서였다. “레이야, 인형 대신 이 토막을 갖고 놀아라. 한국이란 곳에서 나쁜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켜 아버지들은 전기로 돌아가는 인형을 사줄 수 없단다.”

그 같은 기억을 간직한 한국에 그는 95~97년 2사단장으로 첫 사령기를 달 수 있었다. 그가 맡은 2사단은 현대화된 5개의 단단한 여단으로 구성된 사단이었다. 추위가 매서웠던 97년 1월 실시된 탱크, 포 사격 훈련에서 부대원들의 적중률이 저조하자 “다시 실시!”를 반복하며 그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내 직업은 부대원들을 훈련으로 땀 흘리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임무는 모든 이들이 아무런 부상 없이 전쟁에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완벽한 준비를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는 97년 5월에는 유명한 패튼 장군의 3군사령관, 2000년에는 대장 진급과 함께 25개국을 작전지역으로 하는 중부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어렸을 적에 들은 한국에서의 ‘전쟁’이란 말에 군인이 된 이유의 핵심을 두고 있다.

그는 퇴역한 후, 특히 걸프 2차전 후 미국서 일기 시작한 반전 및 대량학살무기 미발견 정부 음모설에 대해 38년간의 군 생활을 통해 얻은 ‘전쟁’에 대한 느낌을 조용히 밝히고 있다. “전쟁 중에는 모든 일이 잘 안 된다. 만약 전쟁이란 것이 손쉽고 편한 것이라면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미국은 위협받을 때만 전쟁한다. 나는 그 밖에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

많은 이들이 프랭크스 대장은 이라크 전쟁이 끝나면 ‘이라크의 맥아더’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맥아더 극동연합군사령관은 1946년 1월 24일 일본의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해 방문한 기지에서 요시다 시게루 일본 수상이 무슨 말을 할 듯하면서도 머뭇거리자 그에게 말했다. “군인도 대체로 마음 깊은 곳은 똑같은 인간이다.”

맥아더는 시게루가 천황제 존속, 일본이 일체의 군사기구를 갖지 않겠음을 헌법에 넣겠다고 하자 ‘숨이 막힐 것 같은 흥분’을 느끼며 말했다.

“국제적인 분쟁의 해결책으로서 전쟁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수단으로, 그것의 폐지는 내가 오랫동안 열정을 기울인 꿈이었다.”(‘맥아더 회고록’에서)

프랭크스는 당시 66세였던 맥아더가 73세였던 시게루와 ‘좋은 군인’,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 살이었다. 그 후 58년이 지나 미국 군인은 ‘좋은 군인’이 되었을까. “전쟁은 시대에 뒤떨어진, 폐지해야 할 꿈”으로 진전되었을까. 대답은 미룬다.

입력시간 : 2004-09-0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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