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40년 독자와 저자


지난 9월 15일께 나온 남재희 선배의 ‘언론ㆍ정치 풍속사 – 나의 문주(文酒) 40년’은 그와 나, 오래된 독자와의 관계를 되새기게 한다. 1963년 봄에 나는 육군 1사단 정훈부가 낸 최초의 사단 신문(주간) ‘전진(戰進) - 전쟁터로 가!’ 의 편집장이었고 ‘사단 기자’였다.

당시 이 신문을 감독하던 정훈부 정모 중위가 말했다. “박 일병! 아니, 박 기자. 제대해 신문 기자 하려면 남재희 기자를 본받도록 해. 기자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가 봐.” 정훈부는 여러 신문을 모아 각 부처에 배달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신문에도 남재희 기자의 이름은 없었다.

정 중위가 남 기자를 유심히 보게 된 것은 62년,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병문 밖으로 보이는 사역장에서 그는 특이한 광경을 잡아 냈다. 사역을 끝낸 4~5명의 병사들이 담배를 꺼내 물거나 잡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나이든 병사는 조그마한 문고판 책을 주머니서 꺼내 읽고 있는 것이었다.

정 중위는 이 사병이 누군지 알아 봤다. 신문 기자였던 남재희 일병이었다. 이 장면은 정 중위에게 ‘신문 기자는 책을 읽는다’는 이미지를 심었고, 전역 후 기자의 길을 갈 것 같았던 나에게 이를 전한 것이었다.

1964년 12월에 한국일보 견습기자(당시는 ‘수습’을 ‘견습’으로 불렀다) 17기로 입사한 나는 남재희 기자가 한국일보 견습 7기로, 조선일보 정치부에 재직중임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한 차례 정도 조선일보 근처에서 만나 인사했다. 그때 정치부 차장이었던 남 선배는 좀 도도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유신이 일어난 직후인 1972년 11월. 당시 나는 서울시경을 출입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경찰서 기자실이 없어지면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시경기자들은 좀 한가해 졌다. 점심 때면 명동까지 건너가 명동입구의 고서ㆍ양서점를 둘러 보곤 했다. 그때 남 선배는 석간이던 서울신문의 편집국장이었다.

남 국장은 전에 만난 적이 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언뜻 정 중위의 ‘책과 기자’를 떠올리며 남 국장을 살폈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책을 고르고 있었다. 동행했던 어느 방송기자가 나를 당겼다. “이봐, 인사 해야지. 그냥 가면 되겠어?” 우리는 남 국장에게 인사했고, 그는 ‘시경 기자들이 무슨 책방이냐’는 투로 덤덤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83년 7월. 나는 정치부장이 되었고, 79년에 국회의원이 된 그는 당시 재선이었다. 그 무렵 나는 국회의원들의 취미를 특집으로 냈다.

남 의원은 책 3만 권으로 지하에 도서관을 꾸민 우리나라 최대의 개인 장서가로 꼽혔다. 그리고 84년 4월 ‘국회 의원들이 뽑은, 일 잘하는 국회의원’에 남 의원은 7번째에 올랐다. 92년 3월에 있었던 13대 총선서 떨어진 남 의원은 그 해 11월 ‘양파와 연꽃 – 체제 내 리버럴의 기도’란 평론집을 내, 나에게 선물했다. ‘朴湧倍님께 著者 드림’ 이라는 휘호가 덧붙어져 있었다. 또 총무이사 겸 통일문제연구소장으로 있던 나에게 1차 걸프 전쟁을 다룬 봅 우드워드의 ‘사령관들’이란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한국일보사를 30여년 만에 나와 97년 3월 이후 언론인이라는 직함으로 몇 번 만나 뵈었다. ‘문주 40년’이 나오기 직전, 서울시청 지하상가의 ‘포린북스’에서 였다. 여전히 남 선배는 책을 찾아 서울을 돌아 다니고 있었다. 그 때가 오후였는데도 “한 잔 하자”는 나의 요청을 거절했다. “나는 낮에는 술을 안 해, 그리고 강의(호남대 겸임 교수)하려면 술은 힘들어.”

‘언론ㆍ정치의 풍속사’가 나온 후 책을 사서 대충 본 나는 어느 결혼식장에서 남 선배를 만났다. “아니, 그래, 책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 중에 나나 한국일보 사람들의 이름은 없습디다.” “이봐! 거기 나오는 사람들은 헛 것이야. 진짜는 안 나오지.” 남 국장(나는 남 선배가 노동부장관이기도 했지만, 편집국장 출신이어서 그를 그렇게 부르기를 좋아한다)이 히쭉 웃으며 하는 대답이었다.

나는 남 국장의 독자로 41년째 머물고 있다. 이번에 나온 ‘문주 40년’은 그의 표현대로, 언론 20년(1958~1979), 정치 20년 동안에 만난 언론인, 문인, 정치인, 술꾼과 마담들(그는 ‘황진이’라고 불렀다)의 이야기 모음이다. 고희(古稀)를 맞고 느끼는 감상(感想)으로 엮었다. 그러나 ‘40년 독자’인 나에게는 문주(文酒)만으로 비치지 않았다. 이 책 속에는 ‘책과 기자’라는 큰 이미지가 감춰져 있을 뿐이다.

남 기자, 남 부장(조선일보 문화ㆍ정치부장)은 책 읽기를 좋아했고, 책을 좋아했다. 니만 펠로우쉽으로 하버드서 1년간 공부한 그는 71년 귀국길에 5백여 권의 책을 사왔다. 그 책 속에는 그 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도 있었다. 남 교수(97년부터 5년간)가 2002년 11월 ‘창작과 비평’에 1백여 페이지에 걸쳐 쓴 ‘긴급 제언 – 남재희의 체험적 정치 개혁론’은 그가 아직도 책 읽기에 열중하는 정치평론가임을 잘 보여 주었다.

40년 독자인 나는 부탁을 올린다. “새해에는 회고보다, 주장에 나서 주십시오. 또 이제 팔순으로 가는 여정에서 ‘내가 읽은 책 3만권’이라며 책에 관한 회고록을 꼭 쓰십시오.”

입력시간 : 2004-12-2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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