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그래도 벤처다


첨단 보안 장비를 생산하는 한 유망 벤처 기업의 A사장이 2000년 초 있었던 일을 들려 줬다. “회사 이름이 좀 알려지고 잘 나간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니까 여기저기서 전화가 많이 걸려 오더군요. 운영 자금이 모자라지 않느냐, 혹시 투자를 받지 않겠느냐 하는 등의 내용이었죠. 돈을 주겠다는 것은 물론 반가운 제의이지만 어딘가 좀 께름칙했어요. 저는 직접 번 돈으로 회사를 운영한다는 철학으로 그런 제의들을 모두 물리쳤죠.”

지금 생각해 보면 코스닥 광풍이 불던 시절, 벤처 기업을 갖고 놀면서 떼돈을 벌던 투기꾼들의 전화가 아니었겠나 하는 것이 A사장의 회고다.

그 때 머니 게임에 동참했거나 직접 주도했던 벤처 기업가들은 사실 수적으로 다수는 아니었다. 많은 벤처 기업가들은 A사장처럼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회사를 일으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맑은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모험과 패기의 연못을 이들이 휘젓고 다니면서 벤처는 완전히 흙탕물이 돼 버렸다.

이로 인해 벤처 업계에는 먹이를 주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고, 자생력을 못 갖춘 아까운 치어(稚魚)들은 속절없이 죽어 갔다.

시간은 흘렀다. 변화도 찾아 왔다. 연못은 점차 정화됐고 험난한 환경에서 살아 남은 성어(成魚)들도 생겨났다.

최근의 벤처를 보면 과거 1차 붐이 일 때처럼 외양만 그럴싸한 기업들은 대부분 솎아졌다는 것이 업계의 진단이다. 나름대로 우수한 기술력을 가진 업체들만 생존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벤처를 다시 육성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 같은 변화를 고려한 측면이 짙다. 게다가 옛날처럼 고용 창출의 진원지가 되어 준다면 금상첨화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남은 것은 벤처라는 말 자체에 담긴 모험심과 도전 정신을 더욱 되살려 국가 경제에 기여하도록 하는 일이다. 정부는 제한된 재원이 골고루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관리자 역할을 충실히 하고, 벤처 기업들은 기술로 일어서겠다는 다짐을 더욱 굳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5-01-05 11:19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