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컴과 현대사회] 구찌가 아니라 블로그에 주목하라


“시대의 좌판 위로 주사위는 던져졌고, 활은 시위를 떠났다. 그저 담대하게 운명의 길을 걸어가리라.”

출사표다. 목숨을 걸고 먼 길을 떠나는 투사의 면모가 역력하다. 뭔가 큰 일을 도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곧 일본 제국주의의 간담을 서늘케 할 만한 거사가 일어날 것만 같다.

그러나 아니다. 이 출사표의 주인공은 일제 강점 시기의 독립투사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방송사의 기자다. 고발 대상이었던 기업체로부터 명품 핸드백을 받은 일로 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MBC의 이상호 기자가 바로 그다. 위에 인용한 대목은 이 기자가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린 글의 마지막 대목이다.

이 기자의 글은 내면적 고백과 참회 그리고 처연한 다짐을 담고 있다. 하지만 파문은 커져 버렸다. 아쉬운 대목은 파문이 확대되면서 이 기자의 글이 담고 있는 본질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 기자가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 글을 올리면서 그 글이 세상에 알려지고 전파되어 파장을 불러 일으키기를 원했는지 아닌지 지금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의도와는 관계 없이 다섯 페이지에 이르는 이 장문의 글은 오늘날 기자 혹은 언론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생각해 보아야 할 많은 과제를 던져주고 있건만 사람들의 시선은 엉뚱한 데로 향한다. 안 그래도 시비거리를 찾던 신문은 ‘사실은…’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문제삼고, 조직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조직인으로서의 도리를 따지고, 어떤 아내들은 명품 가방에 주목한다. 짝퉁이라도 한 번 받아봤으면 좋겠단다.

같은 현상도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것을 어느 정도 용인할 수밖에 없다면, 이번 파문을 통해 미디어가 변화하고 있다는 부분에 주목하고 싶다.

이번 파문은 개인 홈페이지에서 시작됐다. 기자가 기사를 쓰거나 방송뉴스를 만들고, 프로듀서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공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이지만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라고 불리는 1인 미디어는 본질적으로 사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그런 사적인 공간에 오른 글도 순식간에 공적인 영역으로 이전된다. 그 결과는 여느 다른 주류 매체가 보도한 기사 못지 않게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

블로그가 만만치 않은 파장을 불러온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자신의 블로그에 방송사 여자 아나운서를 ‘유흥업소 접대부’로 비하하는 표현을 썼다가 혼이 났던 어느 신문사 기자의 파문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미국 대선에서 가장 각광을 받았고, 위력을 떨친 미디어는 신문도 TV도 아닌 ‘블로그’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부시 대통령의 군 복무 의혹에 대해 미국 CBS 방송이 보도한 기사의 날조 가능성을 제기하고, 결국 이를 입증하면서 블로그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블로그는 미국의 미리엄-웹스터라는 사전이 선정한 ‘2004년의 단어’ 1위에 올랐다.

이제 블로그를 통해 개개인이 독자적인 미디어를 가지게 됐다.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망을 자랑하고, 막강한 네티즌을 가진 우리 나라에도 블로그 바람은 순풍이다. 기자의 기사에 더해 블로그를 반강제적으로 만들어 운용하고 있는 언론사도 있다.

미디어는 거대한 조직에서 개인으로 향해 가고 있다. 이 흐름은 대세로 보인다. 사실 오래 전부터 블로그에 주목해야 한다고 예고한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많았다. 그러나 조심할지어다. 그들은 블로그의 유용함에 대해서는 많이 말했지만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

김종욱 CBS PD


입력시간 : 2005-01-19 17:29


김종욱 CBS PD networking62@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