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첸지천의 두 선물


1992년 8월 24일 한ㆍ중 수교 당시 중국측 서명자로 나섰던 당시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 첸지천(錢其琛). 류동희 중국 문제 전문가는 그를 ‘외교 태상황’이라고 평했다. 주중대사였던 정종욱 교수(아주대 석좌교수ㆍ한국일보 기자 출신)는 “개혁의 총설계사가 덩샤오핑이었다면 개혁 외교를 설계하고 시공한 사람이 바로 첸지천이다”라고 분석했다.

2003년 3월 부총리직을 끝으로 은퇴한 그가 1980년대부터 21세기 초에 이르기까지의 중대한 사건들을 그 동안 보고 들은 것, 느낀 것 등에 버무려 5개월의 집필 기간끝에 ‘국제적인 풍운’이란 책으로 냈다. 제목은 ‘외교십기(十記)’(‘열 가지 외교 이야기 – 중국 외교의 대부 첸지천의 국제정치 비망록’ 지난해 12월 10일께 번역돼 나옴).

그의 비망록 중 제 5장 ‘서울로 가는 길’에는 한중 수교를 둘러싼 중국 공산당 중앙(덩샤오핑을 암시)과 그때의 노태우 대통령, 북한의 김일성 주석의 심경이 상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그 상징 중 하나는 1991년 11월 13일 APEC 참석차 서울에 온 그에게 주어진 황금 열쇠 2개. 또 다른 하나는 한중 수교 실무 접촉을 끝낸 첸지천이 1992년 7월 15일 김일성 주석에게 한국과 중국이 수교할 것임을 알리면서 바친 옥 조각과 여주(암ㆍ수의 누런 꽃이 함께 피는 덩굴풀)이다.

서울에서 받고 평양에서 건네 준 그 선물에는 중국을 둘러싼 남ㆍ북한의 미묘한 관계가 숨어있다. 다음은 1992년 11월 13일을 묘사한 한 부분으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난 다음날이었다.

“그날 밤 재미있는 일 하나가 발생했다. 한국 청소년체육부의 박철언 장관이 몇 차례나 나를 보자고 요청한 것이다. 본래는 만날 계획이 없었으나 계속 전화를 해 왔다. 특히 그는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적지 않은 친구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내 동생인 첸지차오라고 했다. 당시 텐진시 부시장이었던 첸지차오가 문교ㆍ체육을 담당, 텐진이 준비한 국제 스포츠 행사에서 그의 방중을 맞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밤 11시가 다 됐을 무렵, 그는 비서를 대동해 내 방을 찾아왔다. 인사말을 나눈 뒤 그는 우리와 비밀 연락을 하고 싶다며 양국의 수교 실현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자고 했다. 그는 또 오늘 밤 회견은 대통령의 허가를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통령 경선에 나가고자 머지않아 장관직에서 사퇴할 예정이라고 말한 그는 다시 한중 관계 정상화가 그의 주요 정치 임무 중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크고 작은 두 개의 금 열쇠를 꺼내더니 큰 것은 내게, 작은 것은 내 동생에게 선물하는 것이라며 이 열쇠가 양국 관계의 대문을 여는데 쓰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는 당시 박철언 장관이 말하는 대로 우선 듣기만 했다. 이어 나는 그에게 중ㆍ한이 아직 수교를 안 했지만, 정부간 접촉이 이미 시작된 만큼 별도로 비밀 채널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귀국 후 나는 두 개의 금 열쇠를 중국 인민은행에 감정을 시켰는데, 모두 순금이었다. 이는 지금도 외교부에서 보존 중인 것으로 당시 중ㆍ한 관계 발전 과정 중 한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이런 서울에서 느낀 유쾌하지 못한 ‘역사의 흔적’은 다음해 7월 평양에서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첸지천은 양상쿤 국가주석과 아프리카 순방에 나섰다가 7월 12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장쩌민 총서기는 공항까지 나와 천 부장에게 “빨리 김일성 주석에게 중국은 한국과 수교하기로 결정했다는 구두 메시지를 전하라”고 당의 결정을 알렸다.

천 부장은 7월 15일 평양에 아무런 환영식도 없이 도착했다. 상오 11시께 커다란 호반가에 이는 김일성 주석의 여름별장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천 부장은 김 주석에게 장쩌민 총서기의 구두 메시지를 전했다. “나는 덩샤오핑 동지와 중국 당 중앙의 동지들을 대표해 김일성 주석에게 숭고한 경의 축원을 드린다.”

“최근 국제 정세와 한반도의 정세변화를 볼 때, 우리는 중국과 한국이 수교협상을 진행해야 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고려와 결정이 당신의 이해와 지지를 얻을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중국과 북한의 양당, 양국이 장기간의 대외 투쟁 속에 쌓아올린 전통적 우의를 발전 시키기 위해 노력 할 것이다. 또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과 자주적인 평화 통일을 지지하며 한반도 정세를 한층 더 완화시키고 북미, 북일 관계 개선과 발전에 힘쓸 것이다.”

김 주석은 잠시 생각 후 답했다. “우리는 중국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며 또 평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중국과 우호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 할 것이다. 우리는 일체의 어려움을 극복, 계속해 자주적으로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또 사회주의를 건설해 나갈 것이다.”김 주석은 아홉 마리의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모습이 새겨진 옥 조각과 신선한 여지(여주)를 선물로 받은 뒤 첸지천과 작별했다.

첸지천은 결론 내리고 있다. “김 주석은 중북 관계의 큰 그림과 한반도 정세를 감안, 중국의 입장을 이해하고 긍정적이고도 명석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는 곧 앞 세대 선배 지도자로서의 통(대범한 마음)과 안목을 보여주는 것으로 뭇사람들을 탄복케 한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첸지천 전 부총리를 초청, 간담을 갖게 하기를 바란다. 두 사람의 특사가 된다면 더욱 좋다.

입력시간 : 2005-02-0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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