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한국인ㆍ일본인(3)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제주 용담동의 고인돌. 일본 규슈 지방의 고인돌도 이런 남방식 고인돌이다.

신석기 시대 한반도의 문화는 빗살무늬 토기로 상징된다. 그릇 겉면에 빗으로 긁어 놓은 듯 짧고 평행한 선으로 이뤄진 기하학적 무늬가 있다.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는 흔히 시베리아 계통으로 분류된다. 북유럽 일대와 시베리아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와 상당한 유사성을 띤다.

이는 빗살무늬 토기 문화를 가진 북방계 집단이 이 시기에 한반도로 흘러 들어와 정착했다는 추론을 낳는다. 시베리아와 중국 북동부, 연해주, 한반도 북부로 번진 빗살무늬 토기 문화가 점차 한반도 남부로까지 전파되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에 따른 인간의 이동을 함께 떠올릴 수 있다.

문제는 한반도와 시베리아의 빗살무늬 토기는 제작 기법이나 무늬 구성 방법 등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으며 한반도에서 나온 토기의 연대가 연해주 지역보다 앞서는 것도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연해주 지역에서 더 오래된 토기가 아직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문화 전파 경로가 한반도를 거쳐 연해주로 되돌아가는 특수 형태였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순서가 아니라 공통 요소를 추출할 수 있는 문화 벨트의 존재이다.

한편으로 한반도 남부에서는 표면에 가는 선의 돋을무늬(細線隆起紋ㆍ세선융기문) 토기 문화가 있었다. 이는 일본 열도를 동서로 나눌 때 규슈 지역 등 서부지역에서 많이 발견된 토기와 비슷한 형태다. 일본 신석기 시대 조몬(繩文) 문화가 동서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서쪽 지역은 한반도 남부와 상당한 유사성을 띠는 것은 한반도 남부와 일본 서부 지역의 교류를 시사한다.

반면 일본 동부의 신석기 문화는 대륙이나 한반도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굽기 전의 물렁물렁한 토기 표면을 새끼줄로 누른 듯한 무늬를 담은 조몬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와는 계통이 다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조몬 시대를 통틀어 일본의 동서 지역의 문화적 차이는 뚜렷하지만 후기로 접어들수록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동쪽 지역은 수렵ㆍ어로ㆍ채집 문화, 서쪽 지역은 잡곡과 밭벼 재배를 중심으로 한 농경 문화가 주류를 이룬다.

결국 신석기 시대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한 눈에 내려보면 대륙에서 한반도로 뻗은 굵직한 문화 벨트, 한반도 남부와 일본 서부 지역을 잇는 남방계 문화 벨트, 일본 동부 지역 등 세 가지 문화 권역을 보게 된다. 이런 그림은 시대 흐름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며 변화하지만,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서부의 문화적 근친성이라는 기본 형태는 그대로 유지된다.

특히 청동기 시대 들어 일본 열도에 근본적 문화 변동을 부른 이른바 ‘야요이(彌生) 문화’는 한반도 남부 지역과 밀접한 연관성을 드러내고 있어 단순한 문화 전파가 아닌 직접적 인구 이동의 결과로서 이해되고 있다.

1884년 도쿄 분쿄구 야요이 마을에서 600~700도로 구워진 조몬 토기보다 높은 1,000도 가까운 고온에서 구워진 단단한 토기가 대량으로 출토됐다. 조몬 토기와 전혀 형태가 다른 이 토기는 마을 이름을 따서 ‘야요이 토기’로 명명됐다. 조몬 시대 직후의 일본의 청동기 - 철기 시대를 ‘야요이 시대’(BC 4~AD 3세기)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야요이 토기는 조몬 토기에 비해 무늬가 아주 단순하고, 대체로 붉은 색깔을 띤다. 취사용 냄비나 시루, 저장용 항아리, 사발과 접시 등 생활용구로서 한 세트를 이루고 있어 농경생활과 곡물생산이 본격화했음을 보여준다. 규슈 지역에서 시작된 야요이 문화는 점차 동쪽으로 이동해 현재의 간토(關東) 지방에까지 이르는 데 약 100년 정도가 걸렸다. 조몬 시대 말기에 시작된 논벼 재배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일어난 일종의 농업혁명이 야요이 문화의 물적 기반이다.

야요이 문화의 전래 경로를 두고 일본 학계는 시대마다 다른 견해를 보여 왔지만 지금은 북방 문화가 한반도를 남하, 한반도 남부에서 규슈로 전해졌다는 다수설과 중국 남부 해안지역에서 규슈로 직접 전해졌다는 소수설로 나뉘어 있다.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를 상징하는 빗살무늬토기

후자의 견해는 한반도의 문화 교량적 위치를 축소하려는 경향과 대체로 일치하며, 규슈 지역에서 한반도의 탄화미(炭化米ㆍ벼의 화석)와는 다른 형태의 탄화미가 발견됐다는 것 등이 주된 논거다. 그러나 당시의 항해술 수준으로 보아 한반도 남부를 매개 거점으로 상정하지 않고, 중국 남부 해안지역과 규슈를 직결하기는 어렵다. 쌀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 농경문화의 전래가 농기구와 토기 등 다른 문화 요소와 동시에 전래됐을 것이란 점에서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본 열도의 논농사 유적에서는 목기를 만드는 데 썼던 것으로 보이는 돌도끼나 곡물 수확용 반달형 돌칼 등이 함께 출토되는데 이는 한반도 농경문화의 특징적인 유물들이다. 고인돌도 한반도 전래설의 유력한 증거다.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고인돌은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나뉘는데 남방식 고인돌은 야요이 시대 초기 규슈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에서 특수한 형태로 발전한 청동제 무기류가 야요이 유적에서 다량 출토되는 것도 한반도 전래설을 뒷받침한다.

이런 문화 전래가 인구 이동과 동시에 이뤄졌다는 분명한 증거는 야요이 유적에서 출토되는 인골이다. 야요이인(人)은 조몬인에 비해 키가 크고, 얼굴이 길다. 조몬인은 대부분 얼굴이 짧고 둥글고, 키가 작아 아이누족이나 오키나와(沖繩)의 유구인(琉球人), 동남아와 폴리네시아인, 북미 인디언이나 중남미 인디오와 비슷한 계통으로 여겨진다.

선진 금속기 문화를 가진 야요이인은 세력을 동쪽으로 넓혀 갔고 이에 따라 조몬인은 동쪽으로, 그 뒤에 다시 북쪽으로 쫓겼다. 새로운 문화의 전파가 극적인 정치 지형의 변화를 동반한 대표적인 예이다. 그것이 오늘날 일본 동서 지역에 뚜렷한 형질 차이가 나타나는 배경이다. 현재의 일본인은 크게 보아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혼혈ㆍ융합을 이어받은 것으로 이해되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조몬인의 유전적 특징을 많이 안고 있고, 서쪽으로 갈수록 야요이인의 특징이 강하다. 지금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홋카이도에서 명맥을 잇고 있는 아이누족이나 유구인은 조몬인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야요이인과의 접촉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반도 남부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 대한해협 너머 규슈로 건너간 것일까. 인구 이동의 직접적 이유로 가장 유력한 것은 한반도 북쪽으로부터의 정치적 압력이다. 물론 이런 인구 이동이 단 한 번에 이뤄지진 않았을 것이다. 소규모 인구 이동이 기층문화에 작은 영향만을 주고 흡수돼 버려 흔적이 뚜렷하지 않은 반면 대규모 이동은 급격한 문화변동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눈에 띄었을 뿐이다.

신석기 시대에 이미 한반도 남부와 일본 규슈 지방 사이에는 문화적 공통요소가 많아 문화적 교류는 물론 부분적인 인적 교류가 추정된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말에 편입된 ‘아가씨’(소녀)가 ‘아카치’(소녀), ‘아이’가 ‘아이아이’(젖먹이), ‘머리’가 ‘모루’(머리) 등의 아이누어 어휘와 대응되는 등 한국어의 기층에 일부 아니누어 흔적이 남은 것도 지금은 일본 북쪽끝으로 밀려간 아이누족이 먼 옛날 한반도 동남해안 지역과도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아이누족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 지역의 옛 주민이 규슈로 밀려나 조몬 시대에 이미 일본 동ㆍ북부 지역과는 크게 다르고, 한반도 남부와 유사한 문화 흔적을 남겼다. 이들은 기원전 4세기부터 한반도 남부에서 대규모로 이동해 온 야요이인에 다시 떠밀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처절한 살상전이 벌어졌음은 청동 창날이나 활촉이 박히거나 심지어 10대 이상의 화살이 꽂힌 유골의 발굴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야요이 문화의 주인공들은 현재의 한국인과는 어떤 관계일까.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4-06 20:05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