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칼럼] 드라마 '제5공화국'


MBC TV의 새 정치 드라마 ‘제5공화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관련자들의 반발 등 방영 을 둘러 싼 찬반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일단 막은 올랐다. 지난달 23일 전파를 탄 첫 회분은 10ㆍ26의 현장, 궁정동 만찬부터 그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장면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시선을 끌었다.

드라마를 보고 있으려니 26년 전 어두웠던 시절의 기억이 회한의 느낌으로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 당시 필자는 입사한지 채 2년이 안 된 병아리 기자로 편집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그 때는 기자 사회에 악명 높던 술 문화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박 전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 하던 날 밤에도 선배들에 이끌려 청진동 일대를 누비고 다녔고, 급기야 곤드레만드레 취해 여관 신세를 져야 했다. 당시만 해도 야간 통금이 실시되고 있어서 밤 12시가 지나면 꼼짝없이 외박을 해야 했다. 새벽 4시 통금 해제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와 잠깐 눈을 붙이고 깨어 보니 주변이 심상치 않았다.

라디오에서는 정규 방송이 중단된 채 장중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통령 유고라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보도가 통제되었으니 알 턱이 없었다. 부랴부랴 회사에 출근해서야 큰 변고가 있었음을 알 게 되었다.

그 후 12ㆍ12사태, 서울의 봄, 5ㆍ18 무력 진압, 언론 통폐합, 신군부 집권 등 현대사에 격랑을 몰고 온 큼직한 사건들이 숨 막힐 듯이 전개되었다. 부도덕한 정권이 탄생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언론은 무기력했다.

국민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한 일련의 사건에 대해 언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에 괴로워 하며 기자들이 몇 차례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신문의 경우 이른바 ‘기사의 행간을 통해’ 정권의 부당성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것이 전부였다. 오히려 일부 언론은 전두환 장군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을 앞장서 칭송하는 등 결국 ‘태어나서는 안 될’ 제5공화국의 탄생과 유지를 도와 준 셈이 되었다.

당시 언론으로서 제 역할을 못한 점에 있어서는 신문과 방송이 따로 없다. 그 중에서도 구조적으로 정권 편향적일 수 밖에 없었고 대중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이 큰 방송의 책임이 신문보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금도 귀에 생생한 ‘땡전 뉴스’다.

그랬던 방송이 이제 ‘제5공화국’을 정면으로 파헤쳐 보겠다고 나섰다. 그것도 정권의 이름은 물론, 등장 인물들의 이름까지 모두 실명으로 처리하고, 실제 자료 화면을 곁들이는 등 완벽한 다큐 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있다.

10ㆍ26후 채 30년도 지나지 않았고, 아직도 많은 관련자들이 생존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대단한 용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제작진은 “잘못된 과거를 잊지 말자는 교육적 측면에서 방영을 결정했다”고 밝혔지만 쉽게 납득이 가지는 않는다. 지금 시점에서 드라마로 방영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 정권의 실상이 국민의 뇌리에서 금세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제5공화국은 기본적으로 아픈 역사다. 또 세월이 얼마 지나지 않은 가까운 역사다. 이미 사법적 판단과 국민 여론의 심판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역사적 평가다. 그 만큼 길게 보고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 3월초엔 같은 정치드라마 ‘영웅시대’가 석연찮은 이유로 도중 하차했다. 정치적 입김 때문이었다는 논란이 일면서 MBC 정치 드라마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제5공화국은 정권의 등장과 소멸 과정 자체가 긴박하고 드라마틱하다. 따라서 그 시대를 직접 몸으로 겪었던 중ㆍ장년층은 물론이고, 책이나 이야기로만 알게 된 젊은 층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소재다. 이에 따라 많은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을 것이다. 정치성ㆍ상업성 논란을 벗어날 수 있게끔 제작진의 신중성이 요구되는 이유다. 제5공화국 시절의 언론, 특히 방송의 모습이 가감 없이 그려질 지도 관심거리다.

김양배 부국장 주간한국부장 겸 미주부장


입력시간 : 2005-05-03 16:53


김양배 부국장 주간한국부장 겸 미주부장 yb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