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칼럼] 국적을 버리는 사람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조국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것도 나라에서 인권을 탄압하거나 세금을 왕창 물려서 먹고 살기 힘들어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2년간의 군복무가 싫어서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스스럼 없이 버리다니.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병역 의무를 마쳐야 국적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한 새 국적법의 시행을 앞두고 한국 국적을 버리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국적법 개정안이 4일 국회를 통과된 후 하루 1~2명에 그치던 한국 국적 포기 신청자수가 150명 수준까지 늘어났다. 이들은 원정출산 등으로 이중 국적자가 된 사람들이다.

서울 양천구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의 국적업무출장소에는 평소의 수십 배에 달하는 민원인들이 몰려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한다. 출장소측에 따르면 신청자의 95% 정도가 만 17세 이하 남자들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행법상 18세 이상이면 병역 의무를 이행하기 전까지는 국적 이탈이 불가능하다. 이를 감안하면 대부분 신청자들의 목적이 병역 의무를 지지 않으려는 것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세계화 시대에 국적을 포기하고 말고는 순전히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국적을 버리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물론 장기 해외 체류 등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고국에서 군 복무를 하기 어려워 국적을 포기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도 마음먹기 따라선 얼마든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판단된다.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 중에 자원 입대해 군 복무를 충실히 수행했거나 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이 좋은 예다. ‘불가피한 사정’이라는 것이 일종의 핑계일 수 있다는 얘기다.

국적 포기 신청자의 부모 대부분이 상사 주재원이나 교수, 외교관 등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점도 국민을 서글프게 한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인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와 부유층 자제의 병역 비리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지가 엊그젠데 또다시 병역과 연관된 문제가 터져 나와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애정은 누구나 다 똑같을 것이다. 그러나 조국의 의미와 자식의 장래를 고려하지 않는 맹목적 사랑은 오히려 부작용만 안겨줄 가능성이 높다. 아직 완전한 의사 결정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녀로 하여금 조국의 국적을 포기하게 한 후 외국인으로 살도록 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정체성 혼란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2년에 불과한 군 복무를 이유로 자신의 태생적 뿌리를 버리게 한 부모로부터 자식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그야말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의 결과를 가져올 게 뻔하다. 2년 전 국적 포기로 큰 파문을 일으켰던 모 가수의 경우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국적 포기 사태에 따라 우리 나라 고위층, 부유층의 도덕성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남에게 어떤 피해를 주든 나와 내 가족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천한 이기주의는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까. 온갖 편법과 불법, 부도덕한 행위로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행태가 시정되지 않는 한 국가 발전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일반 서민들에겐 “역시 돈 없고 백 없는 사람만 고생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심화시켜 사회적 갈등만을 더욱 키울 것이다.

우리 시대의 염원인 선진국 진입은 경제적인 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사회 전체의 합리성과 도덕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사회 지도층이 솔선수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식이 군대 가는 것이 안쓰러워 한국인임을 포기하게 하는 지도층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다.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고전 회남자(淮南子)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라에 의가 지켜지지 않으면 비록 클지라도 반드시 망할 것이요, 사람에게 착한 뜻이 없으면 힘이 있을 지라도 반드시 상하고 말 것이다.’

귀가 따갑게 들어온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ㆍ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는 그저 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김양배 부국장 주간한국부장 겸 미주부장


입력시간 : 2005-05-18 17:19


김양배 부국장 주간한국부장 겸 미주부장 yb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