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나목(裸木)을 그리며


화가 이중섭과 박수근은 늘 벗고 있었다. 중섭이 발가벗은 아이의 몸으로 태양을 향해 뛰어다녔다면 수근은 푸근하고 따뜻한 체온으로 느릿하게 추위를 껴안고 다녔다.

둘은 살아서는 잠깐 지나쳤지만 신화가 된 뒤에는 내상을 입거나 꿈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알몸의 위대함을 시현하는 동반자로 나서곤 했다.

삶의 궤적이 다른 만큼 두 알몸의 밀어와 울림에도 차이가 있다. 중섭에게 시대는 버거웠고 자신의 또다른 피와 살, 영혼과 격리된데 따른 아픔도 컸다. 그래서 현실에서 벗어나 육화된 언어와 그림으로 가족, 자연이라는 이상에 천착했다. 그가 상대적으로 때묻지 않은 영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를 등진 보상이기도 하지만 시대와 타협하지 않은 순수에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다.

반면 수근은 시대라는 미로에서 헤매지도,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단한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위무하고 한 몸이 돼 시대의 무게를 덜어냈다.

이중섭과 박수근 작품이 갖는 미학적 친밀성과 힘은 인간에 내재한 순수함에 대한 향수와 시대의 부대낌에서 벗어나거나 넘어서는 미소를 제공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메시지에 있다.

그런 이중섭과 박수근이 요즘 시달리고 있다. 작품의 진위를 놓고 유족까지 나선데다 인간의 따뜻한 소통을 포기하고 성급하게 법정의 차가운 칼날 위에 내맡긴 터다. 알몸으로 나선 중섭과 수근에게 너무 많은 속세의 옷을 껴입은 이들이 달려든데 따른 불상사다.

논란이 된 작품들이 법정에서 진품으로 인정받아 이중섭과 박수근이라는 한국 근ㆍ현대 미술의 양대 산맥에 자양분을 제공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진위가 불명하거나 위작으로 판명될 경우 국내 미술계는 치유하기 힘든 또 다른 상처를 입게 될 뿐이다.

다 벗어 우뚝 선 나목(裸木)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그리운 요즘이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5-05-19 17:57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