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왜(倭) (1)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흔히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으로 불리는 책은 중국 진(晉)의 학자 진수(陳壽ㆍ233~297년)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의 동이전을 가리킨다. ‘위서’라는 이름의 다른 역사서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한 이름이다.

총 30권으로 이뤄진 이 ‘위지’의 마지막 권에 오환(烏丸)ㆍ선비(鮮卑)전 다음에 있는 것이 동이전이다. 동이전은 서문에 이어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동옥저(東沃沮) 읍루(揖婁) 예(濊) 한(韓) 왜인(倭人) 순서로 이뤄져 있다.

만주와 랴오둥(遼東)반도, 한반도의 세력에 대해서는 종족집단을 가리키는 동시에 국가 또는 정치ㆍ사회집단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를 쓰고 있는 데 반해 일본에 대해서는 종족집단만을 가리키는 ‘왜인’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언뜻 중국과의 거리가 멀어 자세한 정치ㆍ사회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왜인조’에 서술된 상세한 내용으로 보아 그런 이유보다는 정치ㆍ사회적 발달 정도가 아직 국가 단위로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여기는 것이 나을 성싶다. 위지 왜인전은 이렇게 쓰고 있다.

‘왜인은 대방(帶方) 동남쪽의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산과 섬으로 국읍(國邑ㆍ나라와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원래는 100여국이었고, 한(漢)나라 때는 (중국에) 조공하는 곳도 있었다. 사신이나 통역에 따르면 지금은 30개국이다. …

남자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하고 있다.…몸에 하는 문신은 왼쪽이나 오른쪽, 크고 작음이 존비(尊卑)에 따라 차이가 있다. …풍속이 음란하지 않다. 남자는 모두 모자를 쓰지 않고 머리카락은 (이마에) 두른 띠로 고정하고, 옷은 옆으로 넓은 천을 걸치고 묶을 뿐 거의 바느질을 하지 않는다. 부녀자는 머리칼을 늘어뜨리거나 말아서 쪽을 졌다. 옷은 홑겹으로 그 중간에 구멍을 뚫고, 거기로 머리를 내밀어 입는다. …

날씨가 따뜻해서 겨울이나 여름이나 생나물을 먹고, 모두 맨발로 다닌다. 방이 나뉘어 있어 부모형제가 잠자리를 따로 한다. 붉은 안료를 몸에 바르는 것은 중국의 화장과 비슷하다. 음식은 나무나 대그릇에 담아 맨손으로 먹는다. …

장례 때는 관은 있지만 곽이 없고, 흙으로 봉분을 만든다. 10여일 동안 시체를 안치해 두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 상주는 곡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한다. 상을 마치면 물속에 들어가거나 물을 끼얹어 목욕재계한다. …

그 풍속에 중요한 행사를 치르거나 사람이 오가는 등 무슨 일이든 있을 때마다 뼈를 태워 길흉을 점친다. 우선은 점치는 내용을 고한다. 점치는 법은 (중국의) 거북점과 같다. 열 때문에 생기는 갈라진 틈을 보고 앞날을 점친다. …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다툼이 적다. 법을 어기면 가벼운 죄는 처자를 빼앗아 노비로 삼고, 무거운 죄는 일가와 친족에까지 미친다. 존비에 각각의 등급이 있어, 각자 윗사람에게 굴복한다.…’

위지 동이전 왜인조가 기록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은 3세기, 즉 야요이 시대 말기의 모습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규슈(九州) 지역으로의 대량 이주가 시작된 지 500년이 흐른 시점이다. 그런데 기사의 내용에서는 일부 한반도 풍습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지만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현재의 풍습이 아니라 역사 기록에 남은 아득한 옛날의 모습인데도 그렇다. 그런 차이는 종족 계통의 분명한 차이라기보다는 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현지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일어난 문화 변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보다 앞선 시대의 일본에 대한 묘사는 단편적이지만 ‘한서’(漢書)에 나타나 있다. 1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樂浪)의 바다 가운데 왜인이 있는데 100여국으로 나뉘어 있다. 새해에 (낙랑군을) 찾아 와 공물을 바치고 알현한다.’고 적혀 있다. 1세기 무렵에 중국이 접할 수 있었던 일본의 지역이 규슈지역에 한정됐을 것이란 점에서 그 지역에 난립하고 있었다는 100여국은 집락집단, 또는 부족집단을 가리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지 동이전 왜인조 기사와 합쳐 보면 200년 사이에 적지 않은 정치변화가 있어 100여국이 30여국으로, 즉 보다 큰 정치조직으로 발전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집락집단 가운데 한반도를 거쳐 중국에까지 사신을 파견해 일종의 왕위 책봉을 받은 집단이 있었음이 ‘후한서’(後漢書) 기록이나 출토 유물의 일치로 드러났다.

1784년 후쿠오카(福岡) 시카노시마(志賀島)에서 한 농부가 금인(金印)을 발견해 영주에게 바쳤다. 현재 후쿠오카시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이 금인은 한 변이 2.35㎝ ㅅ돛?정사각형도장에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란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고, 도장 손잡이는 뱀 모양을 하고 있다. 도장은 ‘한의 (아래에 있는) 왜(倭)의 노국왕’이란 뜻으로 해석됐다.

이 금인은 발견 직후 진위 논란에 휘말렸다. 한의 천자는 내외의 제후나 신하에게 인수(印綬ㆍ도장과 그 끈)를 하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때까지 뱀 모양의 도장 손잡이가 달린 인수는 없었다. 인수는 받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 끈의 색깔이 다르고, 손잡이형상도 낙타나 거북 등으로 달랐다. 또 도장에 새긴 문자도 중국 영토의 제후에게 준 것은 ‘○○왕새(璽)’, 영토 밖의 조공국들에게 준 것은 ‘한○○지장(章)’이나 ‘한○○지인(印)’으로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시카노시마에서 발견된 금인의 모양이 이런 관행과 다르고, 규정을 벗어난 문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후대에 만들어진 모조품일 가능성이 있었다.

이 논란은 중국에서 규정과 다른 금인이 발견되고, 같은 곳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금인이 발견되면서 매듭됐다. 1956년 윈난(雲南)성에서 한 무제(武帝)가 BC 109년에 하사한 ‘전왕지인( 王之印)’이 발견됐다. 새겨진 문자가 규정과 달라 규정을 벗어난 인수의 존재 가능성이 확인된 데다 손잡이가 뱀 모양이었다. 또 81년에는 장시(江蘇)성에서 발견된 ‘광릉(光陵)왕새’는 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58년에 내린 도장인데 시카노시마의 금인과 크기와 무게, 문자 조각법 등이 거의 같았다. 이로써 시카노시마 금인은 후한서의 기록과 일치하는 진짜로 확정됐다.

후한서는 삼국지보다도 늦은 5세기에 씌어진 책으로 많은 부분이 삼국지를 압축한 내용이나 삼국지에는 없는 독자적인 내용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기록이다. ‘57년에 왜의 노국이 조공을 해왔다. 사신은 스스로를 대부(大夫)라고 칭했다. 왜의 남쪽 남단에 있는 나라라고 한다. 광무제는 인수를 하사했다.’

이 가운데 사신이 스스로를 대부라고 칭했다거나 규슈의 남쪽 남단에 있다는 등의 내용은 위지 동이전 왜인조에 나오지만 57년에 있었던, ‘노국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해 와서 광무제가 인수를 주었다’는 내용은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금인에 새겨진 문자의 내용과 후한서 기록으로 보아 당시 노국왕이 광무제의 책봉을 받았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왜의 노국왕’이라는 금인의 문자로 보아 규슈 지역을 가리킨 왜 전체를 통솔하는 존재가 아니라 특정 지역의 통솔자로서의 지위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한서 왕망(王莽)전에는 이보다 50여년 전인 5년의 일로서 ‘동이의 왕이 (사신을) 큰 바다를 건너 (보내) 진귀한 특산품을 바쳤다’는 내용이 있다. ‘동이의 왕’이 누구인지를 알 수는 없지만 사신이 큰 바다를 건너게 했다는 데서 왜의 특정 지역 통솔자였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는 후한서 왜전(倭傳)에 107년의 일로서 ‘왜국왕 수승(帥升) 등이 남자 노예 160명을 바치고 뵙기를 청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등 집락집단 단계에서 왜는 중국과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한반도 남부와 규슈지역과의 교류는 훨씬 더 활발했을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황영식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5-26 15:02


황영식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