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1994년 6월15일의 평양


6ㆍ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통일대축전 개막식이 열린 14일 김일성 경기장에는 북한인민 10만 명이 스탠드를 메웠다. 8일 처음으로 평양을 찾은 미국 ABC TV뉴스 특파원 봅 우드러프는 1만2,000명이 다닌다는 김일성 대학이 텅 빈 것을 보았다. 대학생을 포함해 300만 명의 주민이 6월 초부터 모내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13일 서울에서 있은 6ㆍ15선언 5돌 국제 학술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덕담을 나눴다. 노 대통령은 “6ㆍ15선언이 없었다면 북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할 때 그 역사적 의미는 정말 크다” 며 김 전 대통령에 경의를 표했다. 김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이번 회담은 일부의 우려를 씻는 성과 있는 회담이었다”며 “외교적 성과와 노고에 대해 국민적 감사를 드린다”고 화답했다. ‘국민적 감사’는 무엇을 뜻 하는가. 6ㆍ15선언으로 노벨 평화상을 탄 전 대통령이 이제 시민이 되어, 국민이 되어 함께 감사한다는 뜻인가.

이런 때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2000년 6ㆍ15의 남북공동선언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창시자일까. 5월 21일 출간된 워싱턴포스트의 백악관 출입기자였던 존 해리스의 ‘생존자-백악관 속 빌 클린턴’ 평전에는 그렇지 않다고 쓰여 있다. 발간되자 아마존 컴에서 26위에 오른 이 책은 1994년 6월 한반도를 ‘불바다’ 장으로 다루고 있다. 1994년 6월 15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아내 로잘린의 손을 잡고 판문점에서 휴전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북한은 6월 27일께 있는 베이징 행 비행기에 IAEA 모니터요원 3명을 태워 추방하겠다고 세계에 밝혔다. 집권 2년째에 접어든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남미 아이티에서 파견 미군이 피살되고 파병이 거부되는 등의 상황에서 ‘외교에 무능하다’는 비판을 벗어나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북한의 IAEA 모니터 요원 추방은 대북 정책을 강경으로 치닫게 했고 유엔을 통한 경제, 군사적 봉쇄책이 3차례나 미국 안보회의에서 검토됐다. 북한은 봉쇄는 곧 전쟁이라며 “서울을 먼저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떠들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5일 평양에서 김영남 외교부장을 만났을 때 “봉쇄는 전쟁이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험한 말을 들었다. 카터는 16일에 만나기로 한 김일성 주석을 ‘좋은 경찰관’이기를 바랬다. 김 부장은 ‘나쁜 경찰관’ 역을 맡는 것 같았다. 한반도에 전쟁이 날까 불안한 카터에게 김 주석은 “핵무기를 만들려고 영변 핵 연구소를 가동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전기가 필요하다. 핵무기 원료가 안 되는 경수로면 어떠냐. 아직 영변 감시요원이 머물고 있다면 보내지 않겠다” 고 말했다. 카터는 일단 안심했다.

카터는 이날 밤, 16일 상오인 워싱턴 백악관에 있는 국무부 국제문제 및 무기담당 차관보 로버트 갈루치에게 전화했다. 갈루치는 백악관에서 북한 봉쇄가 이루어지기 전 북한의 ‘불바다 공격’을 막기 위한 안보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회의는 각군 참모총장,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 크리스토퍼 국무장관, 얼 브라이트 유엔대사 등이 참석, 유엔 결의 전에 2,000~5만 명의 미군 증강을 논의 중이었다.

이 회의에서 페리 국방장관은 수학박사 학위에 기초한 분석에 의한 전략을 버리고 좀 엉뚱한 대책을 냈다. “저명한 경제학자 갈브레이스(케네디 대통령 시절 인도대사 역임)는 정치란 모든 것이 가능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한 것과 불쾌한 것 중 어떤 것이 나은 지를 선택하는 행위라고 했다”며 그 뜻을 곱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리 국방은 북한을 봉쇄해그들이 ‘불바다’ 공격을 하게 하는 것이 불쾌하지만 위험스럽기에 외교를 통한 협상을 택하자는 뜻이었다. 이런 순간에 카터가 갈루치를 찾은 것이다. 갈루치는 “CNN를 통해 북한 봉쇄의 위험성을 언급하겠다”는 카터의 평양 전화를 안보회의에 보고했다. “북한은 IAEA 요원을 추방 안 한다. 미ㆍ북 3차 회담을 곧 재개하겠다.”

“카터 대통령은 북한이 빠져 나올 수 있도록 잠수함의 해치출구를 열어 준 것이야. 그들은 빠져 나올 체면이 섰으니까.” 해리스 기자의 당시 상황 요약이다. 2000년 6ㆍ15는 1994년 6ㆍ15에 있은 카터의 평양방문의 결실 중 하나다. ‘우리끼리’라는 ‘한반도 국민’이 감사 할 것은 카터, 페리, 갈루치 그리고 해리스라는 기자가 아닐까.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5-06-22 17:07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