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한민족(2)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일반적으로 ‘민족’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민족의 외연을 되도록 넓히려는 경향이 강하다. 민족의 자부심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한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혈연적 공통성을 추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특정의 역사 경험을 전제로, ‘선택적’ 으로 이뤄지고, 혈연적 공통성과 역사의식이라는 민족의식의 양대 기둥 사이를 수시로 오간다는 점이다.

치우(蚩尤)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자.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당시 ‘붉은 악마’의 심벌마크로 귀면와(鬼面瓦)에서 봐 온 도깨비 형상을 닮은 치우의 모습이 등장한 이래 일반인 사이에서는 치우가 역사상 실존했던 ‘한민족의 조상’이란 인식이 조금씩 굳어져 가고 있다.

중국 신화에는 3황5제의 하나인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신농(神農)을 몰아내고 천하를 장악할 당시 신농을 따르던 치우라는 맹장 때문에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기’(史記)와 ‘산해경’(山海經) 등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치우의 형제는 81명으로 하나같이 날래고 용맹했다. 치우는 구리 머리와 쇠 이마를 갖고 쇳가루와 모래를 먹었으며 풍백과 우사를 거느리고 천지조화를 부렸다. 황제는 탁록(涿鹿)이란 들에서 벌어진 최종 결전에서 응룡(應龍)의 도움을 받고, 지남차(指南車ㆍ자석?)를 이용해 치우를 죽이고 천하를 차지했다.

이 신화에서 중국 상고대 정치권력 탄생 과정을 읽어 내려 한다면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정치세력이 동북방 세력과 한 차례 패권을 겨루었으며, 강성한 동북방 세력을 지혜로써 물리쳤다는 줄거리 정도를 추출할 수 있다.

이런 줄거리는 위서(僞書) 논쟁이 끊이지 않는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선 전혀 달라진다. 치우는 배달국 14대 천왕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으로 BC 2,707년에 즉위해 109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6개의 팔과 4개의 눈, 소의 뿔과 발굽, 구리 머리와 쇠 이마를 하고 있었다. 70여회의 전쟁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고, 신농(神農)을 무찌르고, 12개 제후국을 병합하고, 헌원을 황제에 임명했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이런 내용은 객관적 역사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 신화와 마찬가지로 치우를 ‘구리 머리, 쇠 이마’로 묘사했는데 이런 기술은 기본적으로 철기문화가 보편화한 후에나 가능하다. 쇳가루와 모래를 먹는다는 내용은 주물 제조과정을 상징한 것으로, 이 또한 철기문화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더욱이 신화가 묘사한 대규모 전쟁은 그를 수행할 정치세력, 즉 사회적 분화가 크게 진전된 이후의 일이어야만 한다. 최소한 청동기 문화가 무르익고 난 후에야 세속적 이해를 다투는 전쟁이 가능했다. 그런데 중국과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의 철기 연대는 BC 400년 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또 중국의 경우 최근 청동기 연대가 BC 3000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으나 본격적 청동기 문화의 연대는 여전히 BC 1500년 무렵으로 상정돼 있다. ‘사기’의 치우 신화 자체가 철기문화가 꽃핀 춘추전국시대 이후의 상상력으로 전설을 포장한 결과이다.

한편으로 치우 신화는 중국과 주변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치우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전쟁의 신, 또는 군신(軍神)으로 여겨져 왔다. ‘사기’에는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천하에 뜻을 두고 몸을 일으킬 때 치우에게 제사 지내고, 피로 북과 깃발을 붉게 칠했다는 기록이 있다. ‘붉은 악마’와 마찬가지로 치우의 상징색인 붉은 색에서 승리의 힘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치우가 한족에게도 섬김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민족이란 분명한 의식이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 환단고기가 치우를 배달국 14대 천왕, 즉 한민족이 가장 강성했던 시절의 제왕으로 자리매김했듯 중국 남방 먀오(苗)족 신화에서는 치우가 먀오족의 상고대 국가인 구려(九麗)의 왕으?등장한다. 이는 치우가 특정 민족의 전쟁영웅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여러 민족 공통의 군신이거나, 전쟁영웅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일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치우를 굳이 한민족의 조상으로 자리매김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먀오족이 말하는 ‘구려의 왕 치우’에서 구려는 나중에 고구려를 가리킨 구려(句麗)나 고려(高麗)와 비슷한 말이다. 일본에서 지금도 고려를 ‘구리’라고 하는 데서 보듯, 고음 ‘구리’를 나타내는 다양한 음차(音借)의 하나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구이(九夷)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먀오족 신화는 중국 남방으로 흘러 들어간 동이족 일파의 영웅신화가 먀오족의 신화로 현지화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동이족의 중심인 한민족의 가상 역사 공간이 중국 남방으로까지 넓어지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적지 않는 문제가 있다.

전에도 자세히 언급했듯 ‘동이족’은 중국 상고사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으나, 주(周) 이래 중국사에 편입돼 독자적 의미를 상실한 좁은 의미의 동이족과 만주와 한반도, 일본 열도 등 중국 주변부의 다양한 종족집단을 통칭한 넓은 의미의 동이족이 있다. 흔히 한민족과 동의어로 쓰는 동이족은 후자의 한 부분이다. 이를 혼동하면 ‘한민족=동이족’의 범위, 즉 정체성의 중심요소에 대한 적지 않은 혼란이 빚어진다. 민족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 범위를 넓혀 가다보면 경계선이 흐려지고, 나중에는 경계를 설정하는 행위, 즉 민족 인식의 의미 자체가 사라진다. 외형부터 우리와는 크게 다른 먀오족으로까지 영역을 넓힌다면 한민족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혈연적 연관성을 찾는 데 치중하다 보면 더욱 중요한 ‘공통의 역사의식’이란 기준이 흔들린다는 점이다. 치우 신화를 공유한 과거의 집단 사이에서 어떤 혈연적 연관성을 찾을 수 있고, 심지어 사촌 같은 존재였다고 해도 지금 우리의 민족의식으로 그런 집단의 후손들을 같은 민족으로 싸 안기는 어렵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지금부터 3,000년 전에 용력과 지혜가 뛰어난 한 아들이 가족과 종족을 떠났다고 치자. 그는 장자가 아니었기에 본거지에서 재산과 힘을 이어받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 단계 문화 수준이 낮은 지역을 치고 들어가 토착민을 지배하거나 그들과 손잡고 새로운 세력기반을 구축했다. 그의 아들과 그 후손들은 이를 이어가면서 토착민들과 끊임없이 섞여 들어간다. 그렇게 형성된 집단은 외래의 영웅인 그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한 500년쯤 세월이 흐른 후 이 집단의 영역이 그가 500년 전에 떠나온 집단과 경계가 닿는다. 지배층만을 놓고 보면 두 집단의 흐릿한 혈연관계를 추정할 수 있지만 집단으로서 그런 의식을 가질 이유가 없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500년 동안 두 집단의 역사경험이 달라서 전혀 별개의 역사의식을 가졌다는 점이다. 필연적으로 충돌과 전쟁이 빚어지지만 두 집단 가운데 어느 누구도 상대 집단과 ‘한 뿌리’임을 주장할 이유도, 의미도 없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 고려와 몽골의 전쟁, 임진왜란 등이 모두 그랬다.

다만 아주 특별한 필요가 있을 때만 그런 주장이 가능함은 일제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끄집어 낸 ‘동조(同祖)론’의 예를 들 수 있다. 아무리 직접적 혈연관계라 하더라도 일단 방계로 갈라져 세월이 흐르고 나면 그 후손들 사이에서 ‘같은 조상’ 의식을 기대할 수는 없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시 합류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런 의식이 싹틀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합류 이후 새롭게 형성된 동류의식일 뿐이다.

최근 더러 듣게 되는 ‘훈족의 영웅 아틸라 대왕은 한민족’이란 주장도 마찬가지다. 고대 유럽을 뒤흔든 훈족과 흉노족의 관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이 한족에 밀려 이동하기 전 한민족의 조상과 상당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어느 한때 형제 사이였다고 해도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외래 인자가 흡입된 결과 두 집단은 완전히 다른 집단이 됐다. 역사의식을 따질 것까지도 없다. 훈족의 후예라는 헝가리인들과 한국인을 비교해 보면 그만이다. 만주족, 몽골족과 한민족의 관계도 거슬러 올라가면 훈족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누루하치는 한민족’ ‘칭기즈칸은 한민족’ 등의 주장이 나오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황영식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7-22 11:17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