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샤브쉬나의 '1945년 8ㆍ15'


광복 60주년을 맞아 8월 14일부터 서울에서 열린 8ㆍ15 민족 대축전이 16일 하오 끝났다. 16일자 조선일보 A3면의 통단 제목은 “60년 前으로 돌아가나…‘두쪽 8ㆍ15’ 깊은 갈등”이다.

한쪽은 자유민주비상국민회의와 국민행동본부 등 전국 160개 보수단체들. 이들은 ‘대축전’을 “광복절에 김정일과 추종세력들의 굿판”, “대한민국이 죽느냐 사느냐의 위기”라고 소리쳤다. 또 한쪽인 민중연대와 통일연대, 한총련 등도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은 양민학살, 민주주의 말살 주범”, “범청학련 홈페이지 ‘위대한 김정일’”이라는 제목이었다.

이 기간 내내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의 ‘식민지 조선에서’와 ‘1945년 남한에서’를 읽었다.( 두 책 모두 김명호가 번역, 한울출판사에서 낸 책이다.) 1998년 10월 4일 모스크바에서 92세로 타계한 파냐 샤브쉬나. 그녀가 살아 있다면 서울에서 벌어진 이번 8ㆍ15 축전을 어떻게 보았을까.

샤브쉬나는 1945년 8월 15일 당시 서울의 소련 영사관 부영사 아나똘리 샤브쉰의 아내였으며 영사관 도서실 직원이었다. 남편 샤브쉰은 모스크바대학 동방학과를 1934년에 나와 외무성에서 39년 당시 일본제국 경성 영사관에 부임했다.

그가 8년간 부인될 샤브쉬나와 세르뜨 이 몰로뜨(낫과 망치)강연 공장의 압연공으로 일하며 조선의 역사, 민속 등에 쏟은 관심 때문에 공산당은 동방학과에 보내 연구케 했다. 샤브쉬나 또한 대학을 나와 이 강연공장 부설 노동자학교의 교사, 교장을 지냈다. 그러나 당은 38년 그녀를 볼소몰스까야 프라우다(청년 프라우다)지에 기자로 보냈다. 40년 3월에는 남편을 찾아 ‘프라우다’의 특파원 겸임으로 서울로 왔다.

샤브쉬나가 ‘로ㆍ조(露ㆍ朝)’사전을 편찬할 정도로 조선에 해박한 남편을 찾아 ‘아침이 맑은 나라’로 온 1940년 이후 45년 8월15일 아침까지의 조선은 별난 나라였다. 제일 별난 것은 일년 중 반이 경찰의 ‘특별한 감시’아래서 생각, 이동, 집회, 신앙을 가질 수 없는 ‘위험한 날’이 지켜져야만 하는 나라였다. 일본경찰의 비밀사전인 ‘조선경찰용어사전’에는 첫 번째 ‘위험한 날’이 8월 29일이었다. 1910년 이날 일제가 조선을 침탈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이 3월 1일. 1919년 이날 ‘대한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다음이 1926년 순종의 인산에 때맞춰 또 다른 만세운동이 일어난 6월10일. 네 번째는 1929년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벌어진 11월 3일이다.

일제는 이 네 번의 운동의 배경에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사회공산주의 사상이 있다고 봤다. 그래서인지 ‘위험한 날’에는 ▲11월 7일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일 ▲11월 20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창설일 ▲1월 21일 레닌 사망일 ▲5월 5일 칼 막스 생일 ▲5월 4일 중국의 1919년 만세운동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샤브쉬나는 대학에서 문학, 어학을 공부하고, ‘프라우다’에서 학예부장 등을 역임했기에 글쓰기가 가능했다. 그녀는 기자의 눈으로 시달리는 조선인들의 삶을 일기에 썼다. ‘위험한 날’들 속에 갇혀 사는 서울을에 대해 쓴 1945년 8월 15일 그 날의 샤브쉬나의 일기는 담백하다.

“8월 15일. 서울은 마치 쥐죽은 듯했다. 물론 주민들은 일본의 항복을 알고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조심스러운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그런데 그 바로 다음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거세고 억제할 수 없는 행복의 물결. 그 물결은 그대로 시내와 온 나라를 덮었다.”

“8월 16일. 나는 아침에 시내로 갔다. 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텅텅 비고 조용하기만 했던 서울은 완전히 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도처럼 광장과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웠다.”

“대부분이 하얀 명절옷을 입고 있어 끝없는 흰 바다가 흔들리며 들끓는 것 같았다. 건물에는 태극기와 붉은 천, 소련 깃발들이 걸려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깃발을 들고 다녔다. 오랜 세월동안 보관해 두었던 비밀장소에서 꺼낸 것 들이었다.”

샤브쉬나는 46년 모스크바로 돌아가 52년 ‘1919년 조선에서의 인민봉기’라는 첫 저서를 냈다. 53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동방학 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가 1992년에 쓴 최후의 책 ‘식민지 조선’에는 그녀 자신의 조선과 연결된 삶과 학문, 변천한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성공과 몰락에 대한 단상이 그려져 있다.한ㆍ러 수교(1991년), 소비에트의 해체, 고르바초프의 실각을 겪은 후에 쓴 이 책에 그녀는 결론 내리고 있다.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운동의 역사성을 풀이하면서 미래에 대해 쓰고 있다. “오늘날 남한의 정치생활, 특히 남한의 전통적인 ‘발화지점’인 광주의 정치생활과 거기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터져 나오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추적하면서 나는 그것들을 과거의 사건과 비교해 본다. 즉 해방 후 내가 서울에서 직접 보았던 것, 또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의 학생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에게 들었던 것들과 선조와 그들의 진보적인 민주주의 싹의 계승성을 오늘날 우리 눈앞에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이 열정적이고 바람직한 ‘투쟁성’과 생활의 민주화와 자유를 바라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학생들에게 전해진 것은 아닐까. 전통이 그처럼 확고히 서있는 한국에서 과거의 역사는 결코 죽을 수 없다.”

보수건 좌파건, 오늘의 세대들이건, 60년전을 지금 세대의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샤브쉬나가 쓴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5-08-22 17:19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