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가야(3)


김수로왕과 왕비 허황옥에 대한 삼국유사의 설화는 가야가 토착 농경세력과 북방 유목세력(수로왕), 남방 해양세력(허황옥)의 중층적 결합에 의해 성립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중국과 만주, 몽골 지역을 포함한 동북아 정세의 변화에 따른 영향은 수시로 한반도 남쪽 끝까지 밀려왔고, 그 영향은 다시 일본 열도에 파급됐다.

이와 관련해 오랜 논란을 부른 것이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 정복왕조설’, 즉 ‘기마민족설’이다.

북방의 부여계 기마민족이 마한과 가야를 거쳐 일본 열도에 정복 왕조를 건설했다는 것으로 요약되는 그의 가설은 1948년 한 좌담회에서 제기됐다.

일본 천황가의 뿌리를 일본 열도 밖, 그것도 얼마 전까지 일본이 식민지로 지배했던 한반도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황국사관이 만들어 낸 신화에 젖어있던 일본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가설을 둘러싼 논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 일본 고대국가의 성립 기원을 설명하는 유력한 가설로 자리를 잡았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일본 고대국가 중심세력의 기원을 동북아와 한반도에 관련지어 찾아 황국사관의 틀을 깼다는 점에서 한국 학계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북방 기마민족에 의해 한반도 남부에 탄생한 한-왜 연합세력이 일본에 진출해 고대 왕권을 수립한 이후에도 원래의 근거지였던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는 내용은 결과적으로 일제 식민사관이 제기한 임나일본부설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그 때문에 한국 학계에서는 ‘기마민족설’을 변형된 임나일본부설로 파악하고 일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기마민족설에 대한 거부감은 일본이나 한국 학계 모두의 협량을 드러낸 데 지나지 않는다.

일본 학계가 야마토(大和) 정권의 뿌리를 한반도에서 찾는 데 반대하려는 것이나 한국 학계가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와 가졌던 일정한 관계를 부정하려는 태도는 모두가 오늘날의 민족 정서를 과거에 무리하게 들이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예를 들어 보자. 게르만족의 한 갈래로 노르만족이 있었다. 흔히 바이킹이라고도 불렸다.

‘노르만’이란 말 자체가 ‘북방인’이란 뜻이듯 오늘날의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 등 북유럽에 살았던 종족이다.

8세기 경 북유럽에 통일 왕권이 형성돼 감에 따라 전통적 지위를 잃게 된 부족장들이 토지에 정착한 사람들을 제외한 집단을 이끌고 근거지를 찾기 위한 이동을 시작했다. 중세 유럽을 뒤흔든 민족 대이동의 일부였다.

현재의 덴마크 지역에 있던 세력은 프랑스와 영국으로 이동했다. 프랑스왕 샤를르 3세는 이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912년 수장 롤로에게 공작의 작위를 주고, 센강 하류의 노르망디 지역을 영지로 내주었다.

이후 많은 노르만족이 이 지역에 이주해 와 살면서 실질적 독립국을 형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상륙작전으로 유명한 노르망디라는 지명도 그래서 나왔다.

1066년 노르망디공 기용은 바다를 건너 영국을 정복했다. 그리고는 영국왕 윌리엄 1세로 등극했다.

1154년까지 약 100년 간 잉글랜드를 지배한 노르만 왕조의 시작이었다. 윌리엄 1세는 영국왕에 오르고도 노르망디공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사후에 그가 뼈를 묻은 곳은 고향인 노르망디였다.

그의 사후에 장남 로베르는 고향에 남아 노르망디공의 지위를 이었고, 차남은 영국왕의 지위를 이어 윌리엄 2세로 등극했다.

이에 따라 영국과 노르망디는 잠시 분리됐다. 윌리엄 2세가 요절한 후 막내 동생이 뒤를 이어 헨리 1세(프랑스에서는 앙리 1세)는 형 로베르와 싸워 노르망디공국을 합병하고 영국 왕실 지배 아래 두었다.

아들이 없었던 그의 사후 딸 마틸다가 왕위 계승자로 지명됐으나 고종사촌 스티븐의 반발로 20년 가까이 내분을 거듭하다가 스티븐이 죽고, 왕위는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가 이었다.

왕위가 헨리 1세의 외손자에게 이어짐으로써 공식적으로 노르만왕조는 끝이 났다.

그 이후 다양한 혼맥에 의해 왕위 계승권이 이동했으나 현재의 영국 왕실에서 위로 더듬?올라가면 결국 헨리 2세에 이른다는 점에서 노르만 왕조의 혈育?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헨리 2세는 프랑스 서부를 완전히 장악해 프랑스 내 영지가 프랑스왕의 직할지의 몇 배가 될 정도였다.

노르만 왕조의 통치기는 물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영국 왕실의 공영어는 프랑스어였다. 정확히 말하면 노르망디 방언인 ‘노먼 프렌치’(Norman French)였다. 그것이 앵글로-색슨어에 흡수된 결과 태어난 것이 오늘날의 영어이다.

영국 왕실은 대대로 노르망디 지역을 지배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와 잦은 갈등을 빚었다. 프랑스는 루이 9세 때인 1259년 노르망디 지역을 완전히 흡수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년)도 노르망디의 ‘고토회복’에 대한 영국 왕실의 해묵은 집념과 무관하지 않다.

노르만 정복 이후 노르망디와 영국 왕실의 관계를 가야와 일본 야마토 정권의 관계에 대응시켜 보면 기마민족설에 대한 일본이나 한국의 거부감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노르망디 지역의 노르만족이 영국으로 진출했다는 역사 기술에 대해 영국은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노르망디공국 지배층인 노르만족이 영국을 정복한 후에도 노르망디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했다는 역사 기술에 대해 프랑스가 거부감을 갖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극히 비슷할 수도 있는 상황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 일본과 한국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역사를 민족, 특히 이른바 ‘단일민족’의 순혈성을 기준으로 보느냐 아니냐의 차이 때문이다.

또 왕실의 역사를 곧 전체 역사로 보느냐, 역사의 일부분으로 보느냐의 차이도 요인이다.

노르만 정복 이전에 이미 영국 주민이 다양한 종족 집단의 중첩에 의해 형성됐으며 왕실의 혈통에 다른 외국계 피가 수없이 섞여 들어왔음을 인정하는 영국으로서는 노르만 왕조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건너 왔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비슷한 역사 감각을 가진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노르만 정복을 프랑스 민족의 영국 정복으로 볼 이유가 없듯, 노르만 왕조에서 비롯한 영국 왕실의 노르망디 지배를 영국 민족의 프랑스 정복으로 바라 볼 이유가 없다.

기마민족설에 대한 거부감의 모태인 임나일본부설 논란도 다를 바 없다. 일제 황국사관에서 나온 애초의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식민지로서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의 철기문화 발달 수준 등으로 보아 허황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한반도 정치상황의 변화로 남부 가야지역에 압력이 밀려들자 주력이 일본 열도에 정복왕조를 건설하고, 선조들이 묻혀 있는 고향 땅에 일정한 영지를 확보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얘기가 되면 허황됨은 많이 사라진다. 일제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 논리도 되지 않는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의 오류를 지적하는 대신 ‘임나일본부설의 한 갈래’라고 단정해, 내용과 시사점이 전혀 다름을 도외시하는 태도는 좋게 말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격이고, 심하게 말하자면 역사 콤플렉스일 뿐이다.

가야를 무조건 지금의 민족과 동일시해 ‘한민족이 일본 열도를 정복했다’는 담론에 매달리는 것이나, 야마토 정권을 지금의 일본과 동일시해 ‘일본 민족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보는 것이나 오십보 백보가 아닐 수 없다.

같은 수준에서 보는 각도만 달리 한 논쟁을 거듭하면서 어떻게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런 한계는 민족사 위주의 역사 서술이 아니라 지역사 중심의 서술 태도를 취할 때만 극복할 수 있다. 도대체 이 시기에 한반도 남부에 어떤 사건이 있었던가를 최대한 더듬어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사진설명] 가야의 철제 갑주는 기마군단의 위용을 떠올리게 한다


황영식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9-07 14:02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