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가야(4)


1991년 김해 대성동 고분의 발굴 조사로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의 실상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발굴 작업을 주도한 부산대 신경철 교수는 발굴 결과 드러난 고고학적 사실을 근거로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의 성립이 북방 부여계의 집단 이주에 의한 것이었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이동의 방향과 과정 등이 다르긴 하지만 북방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에 정복왕조를 세우고, 일본 열도에 진출했다는 기본 방향은 기마민족설과 일치한다.

그는 극히 말을 조심해 왔지만 자신의 가설이 시사하는 바를 굳이 부인하려고 하진 않는다.

기마민족설을 임나일본부설의 한 갈래로 보고 배척하는 국내 주류 학계의 분위기만 바뀌면 한결 더 많은 사실이 그의 입을 통해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성동 고분이 북방계 유목민족의 집단 이주를 어떻게 뒷받침한다는 것일까.

여러 가지 분명하고도 한쪽 방향을 가리키는 고고학적 증거가 대성동 고분을 중심으로 한 가야 고분에서 발굴됐다.

우선 도질(陶質) 토기의 분포이다. 도질 토기는 1,200도 전후의 고온에서 구워진 단단한 토기로 회청색 경질토기라고도 불린다.

흔히 말하는 신라ㆍ가야 토기가 바로 도질토기다. 도질토기 출현 직전의 삼한시대 토기는 700~800도에서 구워진 와질(瓦質) 토기였다.

이 도질토기는 3세기말 낙동강 하류의 김해ㆍ부산 지역에서 나타나 영남 각지로 퍼져갔다. 더욱이 초기의 도질토기는 반드시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즉 양이부호(兩耳附壺) 형태로 나오거나 함께 출토됐다.

양이부호는 중국 북방 특유의 토기 형식이란 점에서 김해ㆍ부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는 점은 일반적 문화 전파의 결과로 설명하기 어렵다.

순장의 풍습도 3세기말~4세기 초 낙동강 하류인 김해ㆍ부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으로 확인됐다.

유력자가 죽으면 그 노비나 가신을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은 북방 유목민족의 습속이지만 고구려나 백제 고분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신라는 가야의 영향을 받아 4세기 중엽 이후에 채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순장의 풍습이 금관가야 지역의 고분에서 확인된 것은 김해 대성동 고분과 동래 복천동 고분이다.

낙동강 하류 서쪽과 동쪽을 각각 관할하던 지배집단의 공동묘지이다. 금관가야의 성립이 대성동 세력과 복천동 세력의 연합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이며, 부장품 등으로 보아 대성동 세력이 상대적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해 대성동 고분과 양동리 고분에서만 출토된 3세기 말의 오르도스형 동복(銅, 金+復의 오른쪽만 따서- 청동솥)은 북방 유목민족 특유의 유물이다.

제작기법과 형태상 특징으로 보아 제작지가 중국 지린(吉林)성 북쪽 지역인 것으로 여겨진다.

오르도스형 동복이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바 없다는 점은 김해 세력의 상대적 우위를 뒷받침한다.

3세기 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성동 45호분에서는 큰 칼을 일부러 구부려 부장한 예가 발견됐으며 이후 가야 지역에서 폭넓게 확인됐다.

이런 풍습은 흉노나 선비, 부여 등 북방 유목민족 특유의 장송(葬送) 의례다. 또한 같은 시기의 가야 고분에서 철제 갑옷과 투구, 기마용 마구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됐다.

철제 갑옷과 투구는 북방계 특유의 것과 영남지역의 가죽이나 목제를 발전시켜 철제화한 형태가 함께 나오고 있다.

반면 대성동과 복천동 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기마용 마구의 원류지도 중국 동북지방인 것으로 밝혀졌다.

도질토기나 순장, 오르도스형 동복, 무기 훼손, 갑주와 마구 등 북방계 문물은 3세기 말 가야 지역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문물이 중부지역에서 남하하는 대신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북상한다는 점에서 북방 문화가 자연스럽게 전파됐을 가능성은 배제된다.

또한 3세기말 진한(나중에 신라로 이행)과 서진(西晉)의 교섭 기록 등에서 교역의 결과로 추정할 수도 있겠지만 경주 지역보다 낙동강 하류에서 먼저 나타난다는 점에서 부정된다.

더욱이 진한과 변한에서 비슷한 형태였던 목곽묘가 김해형과 경주형으로 뚜렷이 분화했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이는 가야 지역의 급격한 정세 변화가 진한 사회에도 파급돼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를 촉진했을 것임을 추정하게 한다.

그런 급격한 변화를 부를 수 있는 집단으로 신 교수가 꼽고 있는 것이 부여족이다.

중국의 《진서(晉書)》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285년 부여(북부여)는 모용씨 선비족의 공격을 받았고, 그 주력이 함경도 북쪽 해안지역인 옥저(沃沮)로 피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 의려(衣慮)는 자살하고 동생은 나중에 부여로 되돌아가 명맥을 이었지만 옥저로 갔다는 부여 주력집단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당시 동북아는 북방 유목민족의 남하로 유럽의 게르만족의 대이동기 못지않은 일대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측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일을 자세히 기록할 여유가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만주 일대의 대평원을 근거지로 삼았던 부여족이 좁은 해안지역인 옥저에서 살기 어려웠을 것이라면 옥저의 항해술을 이용해 동해안을 따라 남하, 넓은 김해평야로 들어왔을 것이란 추정이다.

이런 추정을 따른다면 변한 12소국의 점진적 통합을 통해 6가야, 또는 5가야의 분열된 상태로 출범했을 것이란 가야의 모습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는 크게 바뀌게 된다.

상대적 우위에 서서 동래 복천동 고분의 주인공인 토착세력과 제휴한 김해 대성동 고분의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부여의 국가, 사회 조직을 이식해 강력한 국가시스템을 갖추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철제 무기와 마구,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기마군단을 보유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에서도 확인된다.

한편으로 대성동 고분은 가야 세력이 바다를 건너 기타규슈(北九州)와 긴키(近畿)지역에 걸친 일본 고대국가, 즉 야마토(大和) 정권의 수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음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는 기원전부터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일본 야요이 문화의 대부분의 요소가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그대로 확인되고, 유전적 형질 면에서도 대단히 가깝다.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양안의 관계는 문화 발전 정도에 따라 날로 가까워졌고, 특히 초기 일본 철기문화는 거의 전적으로 변한, 즉 가야 지역의 철에 의존했다.

김해에서 북방계 유물이 대량으로 나타나는 3세기 말, 즉 야요이 시대 말기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는 김해와 부산에서 대량 출토된 하지키(土師器)라는 일본식 토기이다.

교역 대상이 될 만한 고급품이 아니라 일상 생활용구였다는 점에서 많은 왜인들이 가야 지역에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를 대성동 고분 축조 등 대토목 사업을 위한 노동력 수입의 결과든, 철 교역을 위한 상주 집단이든 양측의 교류가 일상화했음을 알 수 있다.

가야 토기에 뿌리를 두고 일본화한 스에키(須惠器)가 5세기 후반의 가야 유적에서 산발적으로 나오는 것도 적어도 당시까지 가야와 왜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말해준다.

다만 5세기 초에 가야토기가 일본 열도의 분위기를 바꿀 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데 비하면 그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져 교류의 주도권이 가야 쪽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문제는 5세기 초에 대성동 고분군의 축조가 돌연 중단된 것이다. 다른 가야지역에서는 6세기 중엽까지 지배자들의 묘가 만들어진 데 비추어 금관가야 지배층이 홀연히 사라진 듯한 상황이다.

대성동 고분의 주인들을 맹주로 강력한 집단을 형성했던 가야연맹이 이때부터 적어도 3세력으로 분열되는 등 해체기로 들어간다.

이는 광개토왕 비문에서도 드러나듯 고구려의 남하 압력이 한반도 남부의 세력재편을 부른 결과인데 일본 열도의 정치적 격변이 바로 이 시기에 시작된다. 그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황영식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9-13 16:48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