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청계천변 두 풍경


청계천에 전국 8도의 물이 흐르자 100만명의 시민이 축제에 몰렸다. 내일을 여는, 도심 속 개천의 흐름에 감격했다.

그러나 복원의 오늘이 있기까지 청계천변에 펼쳐졌던 숱한 이야기들 중 두 가지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풍경은 조선 후기 영조 대인 1771년 겨울 눈 내리는 어느날 수표교에서 벌어졌다. 남산 밑에 담헌 홍대용(1731ㆍ영조 7년~1783ㆍ정조 7년)이 소유하고 있는 ‘봄이 머무는 언덕’이란 의미의 유춘오(留春塢)라는 집에서는 당시의 지식인과 악사들이 모여 실내 음악회를 즐겼다.

1771년 11월 어느 겨울 날에는 현금을 가장 잘 탔던 금사(琴師) 김억과 ‘열하일기’의 작가 연암 박지원(1737ㆍ영조 13년~1805ㆍ순조 5년)이 거문고와 양금을 타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장악원의 책임자와 공조판서를 지낸 김용겸(1702ㆍ숙종 28년~1789ㆍ정조 13년)이 눈 오는 날의 달빛을 따라 걸어 유소원에 이르렀다.

나이 일흔이 다된 김용겸은 연주에 취해 구리쟁반을 두드리며 시경에 나오는 벌목(伐木)장 대목을 뽑았다.

“나무 찍는 소리는 쩡쩡 울리고/ 새들은 쩍쩍 우네/… 보잘 것 없는 새를 보아도/ 오히려 벗 찾는 소리를 내거늘/ 하물며 사람으로 생겨 났으니/ 벗을 찾지 않고 어이 할 건가.”

일행 중 가장 나이 많은 김용겸은 연주가 무르익자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우리가 예의를 잃어 어른을 돌아가시게 했을까 염려되네”하며 홍대용과 박지원은 그를 찾아 나섰다. 그때 내리던 눈은 그치고 달빛은 더욱 환해졌다.

김용겸은 그의 집 길목인 수표교에서 무릎에 금을 비껴 얹고 두건을 벗은 채 다리 위에서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홍대용 등은 다리 위에 자리를 깔고 술잔을 나누며 음악을 계속 했다.

박지원은 그의 둘째 아들 박종채에게 이날을 “교교공(김용겸의 호)이 돌아가시고 다시는 이처럼 운치 있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 후 230년이 지나 한양대 한문학과 정민 교수는 이 날의 콘서트를 “유쾌한 음악소리와 해맑은 웃음소리가 한밤 종로 구석구석으로 낭자하게 울려 퍼졌다.

이렇게 청계천 수표교 위의 거리 음악회는 깊어만 갔던 것이다”고 썼다.(2004년 나온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에서)

두 번째 풍경은 박태원(1909~1986)이 그린 청계천변 이야기다. 그는 북한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의 작가로, 서울에서는 1938년에 나온 ‘천변풍경’을 쓴 모더니스트 소설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쓴 ‘천변풍경’은 50절(항목)로 되어 있다. 지금의 청계천 남쪽인 중구 다동, 무교동, 삼각, 수표, 입정동 근처와 북쪽인 서린, 관철, 장사, 예지동을 중심으로 한 세태풍속이다.

화신상회(종로타워), 광교, 광통교가 있고 당구장, 카훼(카페), 이발소, 선진(여관), 아이스 쿠리(아이스크림), 군밤이 팔리는 1930년대의 청계천변이 밀도 있게 표현되어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발소 머리깎기 소년에서 빨래터의 여인들, 카페 걸, 중절모를 쓴 신사, 청계천 다리 밑에 사는 깍정이(거지) 등이다. 이들 100 여명의 인물들이 어떤 희망을 갖고 사는가가 잘 드러나 있다.

“더구나, 소문을 들으면 뭐 청계천을 덮어버린단 말이 있지 않아? 위생에 나쁘다던가…. 그러니, 정말 그렇게나 되구본댕야 이젠 삼순구식(서른 날에 아홉 끼니를 먹는단 말로 몹시 가난 함)두 참 어려울 지경이니…. 흥 말두말어”라는 대목이 있다. ‘천변풍경’은 1935년에 경성도시계획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근간에 쓴 것 같다.

이 소설의 마지막 절인 ‘천변풍경’은 희망적이다. 중산모를 부와 권력의 상징처럼 쓰고 다동에서 종로통까지 천변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종로의 포목전 주인의 중산모가 날아가 청계천 똥물에 떨어지는 장면의 묘사다.

이 소설의 천변 목격자인 이발소 머리깎기 재룡이가 전하는 풍경.

“그렇게도 그가 벼르고, 기다리던 포목전 주인의 중산모가 끝끝내 바람에 날아 떨어진 것이다. 그 불운한 중산모는 하필 고르디 골라, 새벽에 살얼음이 얼었다가 막 풀린 개천물 속에 빠졌다.”

“상판대기에 불에다 덴 자국이 있는 깍정이 놈이 다리 밑에서 뛰어나와 얼른 건졌으나, 시꺼먼 똥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코에다 갖다 대보지 않더라도 우선 냄새가 대단할 듯 싶다.”

“포목전 주인은 잠깐 망살거리는 모양이었으나 마침내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 그 사이에 모여든 구경꾼들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에 얼굴을 붉히고, 다음에 손상된 위신을 회복하려고 엄숙한 표정으로 연래(여러 해 전부터) 애용해오던 모자를 개천에 남겨둔 채, 큰 기침과 함께, 그는 그 자리를 떠나 자택으로 향했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해제한 한남대 국문과 장수익 교수는 이 장면을 식민지시대에 순응하고 아부하며 사는 것을 ‘일상성’으로 가진 포목전 주인을, 아직도 삶을 통해 꿈을 이루려는 서민들이 경멸하고 있는 장면을 잘 표현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 서민들이 느꼈던 ‘천변풍경’은 희망으로 끝난다.

“천변의 구경꾼들은 얼마동안 좀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중산모를 삐뚜룸히 쓴 깍정이 녀석이 바로 흥에 겨워 ‘채플린(찰리 채플린)’ 흉내를 내고 있는 꼴이 제법 흥미 깊었던 까닭이다.”

“입춘이 내일모레라서, 그렇게 생각하여 그런지는 몰라도 대낮의 햇살이 따뜻한 것 같기도 하다.”

복원된 청계천변을 찾는 시민들은 수표교에서 있었던 ‘다리 위의 콘서트’, ‘청계천변에서 날아가버린 중산모’의 두 풍경을 기억하길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5-10-11 15:26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