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드문 일이다. 102살의 할아버지가 책을 냈다. 2002년 9월 나온 최태영 박사의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다.

1954년 학술원이 세워졌을 때부터 회원이며 부산대 인문대학장, 서울대 법대 학장, 중앙대 법문학 부장, 청주대 대학원장을 지낸 최태영 박사. 20세기가 시작되던 1900년 3월28일(음력) 황해 은율에서 태어난 최 박사가 11월30일 106세가 넘어 타계한 것은 가족 외에는 몰랐다.

많은 사람들은 최 박사가 77세 때 1만4,000장에 달하는 ‘서양 법철학의 배경’을 저술,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받은 사실(史實)을 몰랐다.

더욱 몰랐다. 88세에는 한국 사학계, 서울대 사학과의 태두인 이병도 박사(1896~1989)와 함께 ‘한국 상고사 입문’을 낸 것이다.

그때까지 이 박사는 단군과 고조선의 사실에 대해 약간의 회의를 느끼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박사는 “(당신은) 한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일본사만 공부하고 일본인과 이완용에게 이용된 것입니다”는 최 박사의 비평에 종래의 사관을 바꿨다.

이 박사는 ‘상고사 입문’을 최 박사와 같이 내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예부터 단군을 국조로서 사당을 세우고 최고의 조상으로 제사를 받들어 왔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은 일제의 강점 때부터였다. 지금까지도 여러 곳에 그 제단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 그 제사의 진설도(陳設圖)와 세년가가 세전 되어오고 있다. 신화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처럼 역대 왕조에서 조의에 의하여 받들어지지는 아니 했을 것이다. 아무튼 실존 인간 단군과 영구한 역사를 이어온 고조선에 관하여는 더 연구할지언정 신화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썼다.

최 박사가 법학 교수에서 벗어나 고조선과 단군의 나라를 연구하는 것은 1935년 ‘5천년간의 조선의 얼’(후에 1946년 ‘조선사 연구’로 출간)을 쓴 위당 정인보(1892~1950ㆍ납북 사망, 초대 감찰위원장)의 사관을 따른 것이다.

최 박사는 메이지 대학을 1924년 영어ㆍ법학ㆍ철학을 공부한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 다음해 보성전문 법과의 첫 한국인 정교수가 됐다.

정인보는 그의 부친과 친교가 있었고, 보성전문의 교수였던 김성수(1891~1955ㆍ3대 부통령) 집에 모이는 4인 사랑꾼이었다.

최 박사는 6ㆍ25때 그가 납북되자 그의 단군과 그의 나라, 그 문화에 대해 한문, 일어, 영어의 실력을 구사해 연구했다. 그 결과가 ‘상고사 입문’이었다. 100세가 되자 이 책을 좀더 대중화시켜 ‘한국 상고사’로 개작하고 ‘인간 단군을 찾아서’의 역사 회고록을 냈다.

그가 이병도 박사를 설득했듯이 “단군은 서기전 2333년에 백두산 근처에 환국(桓國)을 세운 임금이며, 제사장이며, 고조선의 개조며 널리 사람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弘益人間) 신념을 가진 예, 맥, 고구려, 부여, 신라, 백제의 한족의 ‘우리 할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는 옛 역사서들의 실증에 30여 년을 쏟아 102세 때 회고록과 실증사실을 종합해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를 냈다. 아마 102세 할아버지가 책을 낸 것을 세상에 없던 일이 아닐까.

그러나 88세 할아버지가 낸 ‘상고사 입문’을 몰랐는지 1988년 후의 한국정부는 단군에 대해 냉랭했다.

1991년에 최 박사는 정원식 문교부 장관을 찾아 갔다. 한ㆍ중ㆍ일ㆍ소 한국학 학자들의 한민족 학술대회 후원 때문이었다. 정 장관은 “역사학자 다수가 단군은 실증주의에 맞는 게 아니라며 없다고 하는데 선생은 왜 단군 찾는 세미나를 한다고 하시오”하며 거절했다.

최 박사가 맞섰다. “역사는 사실이지 다수결이 아니다. 다수결 좋아 마라. 이완용, 송병준 그자들도 나라 말아 먹을 때 내각 다수결이라며 한ㆍ일 합방에 조인했다.”

이어령 문공장관이 나서 “그렇다면 문공부가 후원하겠다”고 해 세미나는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102살의 최태영 박사는 역대정권의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역사의식을 회고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친일파들과 일했지만 단군연호를 법률로 채택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1980년대에 안국동 한옥 저택에 ‘국사찾기운동본부’를 만들어 단군에 관한 강연을 하도록 했다. 윤 전 대통령은 “단군의 존재는 인정하고 그 모임을 만든 것인데 그의 사후 모임은 없어지고 기록도 남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가 1961년 단기를 폐지한 것은 큰 실책이다. 이 때문에 서기전의 일들이 모호한 것처럼 격하되었다. 단기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단군문제는 지금처럼 복잡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은 물었다. “몽고와 우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최 박사는 “같은 후손이지만 우리가 몽고의 후손은 아니다”고 대답했다.

역대 대통령의 단군에 대한 생각에는 뉘앙스가 다르다.

“역사를 다수결로 결정할 수 없다”, “홍익인간은 최대다수의 최대의 행복”이란 것을 단군에서 1세기를 넘어 산 최태영 박사는 느꼈다.

대선에 나설 후보들은 단군에 대한 사관을 가지려면 최태영 박사의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를 꼭 읽길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