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노무현씨가 되면 좋겠지만… 지금 움직임 같아선 한국에는 절대적으로 우익세력이 강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노씨가 당선돼야 나아질 텐데…노씨가 당선되면 김대중 정권보다 좀 더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회창씨가 당선되면 또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생각이에요.”

“나는 속으로 노씨가 당선되길 은근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만…내가 57년 만에 고향을 방문했지만 일제 시대밖에 모르거든요. 하여튼 천지가 개벽 된 것 같은 고국의 모습에 놀랐어요. 일제 시대 때 구박받았던 기억만 남아 있어요. 나 어릴 적에는 민둥산뿐이었는데 아무리 산천이 변한다고 하지만 산이 새파랗게 우거져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입니다. 도시는 발전하고, 시골에도 전부 신작로가 생기고 자동차가 많아져 한국은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가 돼 버렸어요.”

1917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33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예술대학 문예학과를 졸업하고 통신사 기자, 교사를 하다가 해방 후 조국건설연맹(후에 조총련)이 발행하는 해방신보(후에 조선신보)의 논설위원, 소설가를 지낸 리은직 옹.

그가 2002년 12월5일(대선 10여 일 전) 요코하마의 자택에서 1945~52년 일본의 미 군정 하에서 재일한국인이 낸 신문, 잡지 등 언론의 실태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인터뷰하러 찾아온 윤희상(전 동아일보 기자, 메릴랜드대 언론한 박사, 2006년 1월 ‘그들만의 언론’출간)씨와 가진 대화에서 한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앞으로 남은 4,5년
차 집권기간 중 역사에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리은직 옹이나 레이건의 역
사적 도움에 대해 많이 생각해야 한다.

리 옹은 두 아들을 평양에 보낸 ‘그들만의 언론’의 재일한국인 언론인이면서 조총련의 간부도 지낸 ‘재외 공민’이다.

리 옹은 “우리나라는 절대로 통일되지 않고서는 좋은 나라가 될 수 없어요. 아무리 남쪽의 경제가 발전하더라도 통일이 안 되면 우익세력이 사라지지 않습니다”고 말했다.

리 옹은 또 “북조선에는 1980년대와 90년 무렵 등 모두 세 차례 방문했어요. 북쪽에는 어찌나 관료주의가 심한지 일본에서 우리가 가면 안내원이라는 전문일꾼들이 따라붙어요. 싫증이 날 정도입니다. 손자들을 생각하면 가기는 가야 하는데 이젠 정이 떨어져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안나요.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 해도 저렇게 외고집을 부려 관료주의를 고수하는 나라는 거기뿐입니다. 우리 속담에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지요. 경제가 파탄난 북쪽은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해도 시기를 놓쳐 안 될 것입니다. 철도를 연결해 개성과 신의주 특구를 만들어 경제개발을 하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될 리가 없고 신의마저 잃어 신용없는 나라가 됐어요. 한국 자본가들이 투자하려고 해도 까다로운 조건이 많으니 그다지 내켜 하지 않잖아요. 그러니 잘 안 될 겁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라고 체험담을 털어놨다.

리 옹은 그가 교육부장을 지낸 조총련 내에서의 지위로 보거나 언론인으로, 역사학자(94년 ‘중고교생을 위한 한국사 명인전’3권의 저자)로서의 경력을 보건대 북한에 치우친 좌파주의자로 생각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터뷰할 때 85세였던 리옹의 북한에 대한 생각은 강경하다.

“그러니까 내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면, 거 이북이 빨리 망해야 쓰겠어요. 망하면 조국통일이 빨라질 겁니다. 내 개인적 양심으로 생각하면 지금 북조선공화국의 정책은 근본부터 틀려 먹었어요. 북쪽은 빨리 찌그러져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죠. 일본에 있는 내가 여기서 운동(반대)을 할 수도 없는 게고, 그렇기 때문에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그건 공화국 안에 있는 우리 민(북한 인민)이 봉기해야 합니다. 그건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학살당할 각오를 하고 거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용기있는 사람들이 북쪽에서 집단적으로 생길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북쪽 민들이 중국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리 옹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씨’를 지지했다는 것은 지난달 25일로 집권 4년째를 항해하는 노 대통령에게는 큰 도움이었다.

노 대통령은 취임 3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밝혔다. “당선된 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다. 대중적 파워로 특수한 선거조직으로 당선된 것이다. 그 시대적 의미를 되밀리지 않고 밀고 나가는 것, 지켜 나가는 것이 제가 대통령이 된 역사적 의미이고 지켜 나가야 할 역사적 방향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역사적 의미’에는 리 옹 같은 재외동포 언론인의 마음속 지지가 있었기에 그 깊이를 더한다.

노 대통령이 역사의 무대서 뛸 자리를 만들어 준 숨은 인사는 지난호 ‘어제와 오늘’에서 소개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도 있었다. 레이건의 재임 막바지인 1988년 3월23일에 러시아의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백악관을 방문했다. 미·러 간 마지막 정상회담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레이건은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엉뚱한 말을 던졌다.

“서울올림픽 때 북한의 테러가 있을까요?”

“러시아가 올림픽에 참가하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레이건의 이런 세심함이 있었기에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다. 그것은 역사적 도움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앞으로 남은 4,5년차 집권기간 중 역사에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리은직 옹이나 레이건의 역사적 도움에 대해 많이 생각해야 한다.

우선 윤희상의 ‘그들만의 언론’을 읽기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