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이미 사과했습니다. 우리는 거듭 사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과에 합당한 실천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일본이 보통국가, 나아가서는 세계의 지도국가가 되려고 한다면 법을 바꾸고 군비를 강화할 것이 아니라 먼저 인류의 양심과 도리에 맞게 행동하여 국제사회의 신뢰를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대다수 일본 국민들의 뜻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본 국민의 양식과 역사적 대의를 믿고 끈기 있게 설득하고 요구해 나갈 것입니다.”

제87주년 3·1절에 노무현 대통령의 기념사의 주요 대목이다.

이에 대해 한국일보 3월2일자 사설은 ‘대통령 3·1절 발언 시원하기는 한데’라는 제목으로 염려했다.

“한편으로 우리는 외교 문법에 어긋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우려한다. 고이즈미 총리의 해명을 직접 언급해 반박한 것은 도가 지나쳤다. 야스쿠니 문제는 일본 국내에서도 이미 고이즈미 총리의 개인적 자존심 차원의 문제로 돼 가고 있다. 반대 여론이 커지고 미국의 눈길도 곱지 않다. 따라서 문제의 장기화가 아닌 해결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상대를 무조건 밀어붙이기보다 체면을 살릴 틈을 열어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이 건전한 외교상식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일본 국민의 양식과
역사적 대의를 믿고 끈기 있게
설득하고 요구해 나갈 것이다"

일본 릿교대학에서 국제정치를 가르치는 이종원 교수는 ‘겉도는 한·일 관계와 전략대화’라는 기고문을 한겨레 신문에 실으며 또한 우려했다.

노 대통령의 기념사에 대해 일본 정계와 언론은 ‘내정간섭’이라 반발하며 ‘미래 지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몰아붙였다.

일본이 ‘보통국가’가 되려고 한다면 ‘법을 바꾸고 군비를 강화할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구절을 문제삼은 것이다.

주요 일간지들은 일제히 ‘일본의 개헌 움직임을 견제할 것’이라고 해설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불쾌감’을 표시하고, 아베 신조 관방장관은 ‘헌법 개정은 내정 문제’라고 반발했다고 한다.”

한국일보 사설, 이 교수, 일본 언론이 주목 못한 대목이 있다. 노 대통령이 여러 가지를 주장하다 보니 강조를 놓친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본 국민의 양식과 역사적 대의를 믿고 끈기있게 설득하고 요구해 나갈 것이다”라는 말이다.

엉뚱한 상상일지 모른다. ‘양식 있는 일본 국민’은 누구일까. 정확한 대답이 될는지 모르겠다.

“저는 처음 조선에 왔을 무렵, 이곳에 산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걸리고 조선인에게 미안해서 몇 번이나 일본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 조선에 온 뒤 조선인과 친해지지 못했을 때 외로운 마음을 위로하고 조선인의 마음을 이야기해준 것은 역시 조선의 예술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제가 조선에 있는 것이 언젠가 무엇인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기도드립니다. 그렇게 외로운 마음에 희망을 받고 있습니다.”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 후 요미우리 신문 5월20일자에 실린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기고문에 나온 ‘서울로부터 날아온 친구의 편지’의 글 일부다.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1922년 4월 동아일보에 ‘광화문을 애도함’을 기고한 ‘미학적 아나키스트’, ‘조선의 미’의 대가로 알려진 평화주의자다. 서울에 조선 민족박물관을 세우고 도쿄에 일본 민예관을 세운 사람이다. 1984년 한국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런 야나기에게 편지를 쓴 사람은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1914년 조선에 와 ‘임업시험장의 기수를 지낸 ‘조선의 소반’, ‘조선 도자기명고’ 등을 쓴 사람이다.

현재 쓰다주쿠 대학 국제관계 교수로 있는 다카사키 소지가 지은 ‘조선의 흙이 되다.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김순희 번역, 2005년 11월 출간)에는 17년간 조선에 살며 1931년 4월2일 양주군 이문리에 묻힌 그의 일생이 시처럼, 소설처럼, 연극처럼, 영상으로 가슴젖게 쓰여 있다.

그의 누이 사카에(1985년 98세로 죽음)가 회고하는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옷을 입은 다쿠미는 정말 형색이 변변치 못했죠. 그래서 조선인으로 오해받아 ‘요보’, ‘요보’라고 놀림을 받곤 했어요. 전차 칸에 앉아 있을 때 누가 ‘요보, 비켜’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라고 하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학교를 그만둔 청년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딱하다고 등록금을 내주며 학교에 보내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맏물이라며 옥수수도 갖고 오고 무도 갖고 오고, 마당을 쓸어주거나 목욕물을 퍼올려 주기도 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도 용돈을 주었답니다. 월급날이면 그에게 거지들이 동냥하러 오기도 했는데, 월급이 늦게라도 나온 달이면 ‘내일 다시 오게 했답니다.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지요.”

평전을 번역한 오사카에서 태어난 김순희 교수(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는 다쿠미를 평했다. “다쿠미가 조선인을 닮아서 조선을 좋아했다기보다 그가 진실한 의미에서 올바른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미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올바른 일본인’이 누구인가. 바로 노 대통령이 말하는 ‘양식 있는 일본 국민’일 것이다.

일본을 알고 싶은 노 대통령과 대선주자들은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을 읽어야만 한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