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오후 2시 서울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에서 제131회 이승만 박사 탄신 추모식이 있었다.

‘대통령과 국가경영–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를 3월 20일에 펴낸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김충남 연구위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위상’이란 주제 강연에서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의 위대한 역사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 분만큼 잘못 알려지고 비난받는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건국,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확고한 원칙으로 나라를 세웠고 공산 침략자들을 물리친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육사 출신으로 서울대 석사, 미국 미네소타대 박사인 그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냈다. 98년에는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을 출간하기도 했다.

올해 66세인 그는 ‘대통령과…’책에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에 대해 124쪽이나 할애했다. 국부(國父)라는 표현도 가끔 썼다.

김 박사는 계속 썼다. “현실주의자인 이승만은 당장은 통일이 불명하다면 휴전반대라는 지렛대를 이용해서 국가 안전을 확보하는, 즉 미국과는 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고자 했다.”

“그는 단순한 국가지도자가 아니라 진정한 애국자였고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국민적 영웅이었고 건국의 아버지였다.”

“그가 스스로 말했듯이 그는 평생을 ‘선동가’로 살아왔으며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중을 설득하고 동원할 수 있는 능력(웅변술)이 뛰어났다”며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 되려고 했다”고 요약했다.

‘선동가’, ‘웅변가’라는 면에 인간 이승만의 면모가 약간 보이지만 과연 그럴까?

이에 대한 해답이 될는지 모르겠다.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객원교수였던 이정식 박사(1931년생, 미국 펜실베니아대에서 63년부터 교수·명예교수 지냄)는 지난해 10월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급진주의에서 기독교 입국론으로’를 펴냈다.

"그는 단순한 국가지도자가 아니라 진정
한 애국자였고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국
민적 영웅이었고 건국의 아버지였다."

이 박사는 책의 후기에서 ‘이승만의 반세기’라는 글을 썼다. “60년 4월의 어느 날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나와서 사택 이화장으로 가는 길에 운집했던 젊은이들을 보면서 그는 60년 전의 자신을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의 주인공인 그 옛날의 이승만은 그날 모였던 어느 젊은이 못지않게 강직하고 착하고 훌륭했었다. 필

자는 그 시기의 젊은 이승만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놀라고 또 놀라곤 했다. 과격한 행동파였던 그는 손꼽히는 논설기자(뎨국 신문), 감동적인 기독교 전도사로, 그리고 체(體), 지(知), 덕(德)을 구비한 민족지도자로 개척에 개척을 거듭하고 있었다. 30세가 되기 전 근대화의 선두에 서 있었다.”

이정식 박사는 ‘과격한 행동파’였던 이승만을, 이승만 스스로 1912년에 쓴 자서전(自敍傳)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이를 ‘청년 이승만 자서전’이라 이름 붙였다.

1898년 11월 6~7일, 중추원 의관(議官)이 된 23세의 이승만은 종로에서 벌어진 대규모 집회인 만민공동회의 농성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추원 개원 첫날 이승만 등이 제의한 개각 요청에 고종이 중추원을 폐쇄하며 잡아간 17명의 의관을 풀어주라는 시위였다.

이승만은 그의 ‘자서전’에 적고 있다. “하루는(11월7일께) 이른 아침에 칼을 빼든 한 무리의 병정들이, 나팔수와 북치는 병정들을 선두로 우리를 향해 돌진해 왔다. (…) 병정들은 우리가 있는 곳에 다다르자 우리 모임을 뚫고 지나가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병정들을 향해 뛰어가 북치는 병정들에게 대들어 그들을 막 발로 찼더니 그들은 조용히 방향을 돌려 천천히 돌아서 행진을 하고 우리를 괴롭히지 않았다. 신문이 이 광경을 그대로 보도해서 사람들은 나를 용사(fire eater)라고 불렀다.”

영한 사전에서 fire eater는 ‘싸움을 좋아하는 괄괄한 사람’으로 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용사’라고 쓴 것을 이정식 박사는 ‘불타는 운동가’로 표현했다.

1905년 7월 7일 워싱턴의 조선제국 주미공사관에 온 이승만은 김윤정 공사대리의 두 아들을 보고 울부짖었다. 전날 만난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승만에게 한 “조선이 러·일전쟁 휴전회담에서 이익을 침해받지 않으려면 공식 문서를 국무부를 통해 보내라”는 요구를 김 공사에게 전했지만 거절당했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지만 너희들의 자유를 팔아먹고 있다. (…) 나는 너희 아버지가 이 공사관을 일본 사람들에게 넘겨주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나는 이 건물을 불살라버릴 것이다.”

이정식 박사는 북치는 병정에 발길질한 ‘용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공사관을 불사르겠다는 30대 열혈 ‘운동가’ 이승만이 만년에 독재자로 쫓겨난 이유를 조금은 감상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배재학당에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선교사에게 한국말을 가르쳤고, 얼마 후에는 대신들과 외국사절들을 포함한 ‘고위층’ 앞에서 영어 연설까지 했던 경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때에 느꼈던 우월감이 그의 정치 역정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너무도 영리했었는데 그의 우월감이 자아낸 그늘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갖지는 못했던 것이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