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부흥 이끌었던 신상옥 감독 별세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다간 영화감독 신상옥씨가 11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0세. 2004년 C형 간염으로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 지난달 말 병세가 악화됐었다.

생전 그는 톱배우 최은희씨와의 결혼, 납북과 탈북 등 한 편의 영화같은 질곡의 운명 속에서도 불굴의 예술혼을 불사른 영화인이었다.

1926년 10월 18일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신 감독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5년 일본 도쿄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고려영화협회 미술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감독 데뷔작은 김광주 원작 ‘양공주’를 영화화한 ‘악야’였다. 이때부터 신프로덕션이라는 회사를 차려 제작을 겸했다.

이후 안양촬영소를 인수해 세운 신필름은 국내 최초의 대기업형 제작소로 75년 문을 닫을 때까지 20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한동안 사람들은 한국 영화계를 신필름과 충무로로 양분해 부르기도 했다.

이에 앞서 53년에는 인기 절정의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결혼으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후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한 ‘무영탑’(1957), ‘동심초’(1959)에서부터 ‘돌아온 사나이’ ‘로맨스 빠빠’(1960) 등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한국의 대표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61년에는 자신이 감독한 ‘성춘향’을 고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함께 개봉하여 ‘춘향전’을 누르고 기록적인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그 해 만든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신 감독은 기막힌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75년 영화 ‘장미와 들개’ 예고편의 검열 삭제 부분을 극장 개봉 때 다시 붙여 상영한 것이 적발돼 신필름의 영화사 등록이 취소됐다.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각별한 관계였지만, 검열의 족쇄를 피해가진 못했다.

78년 1월에는 사업차 홍콩을 방문한 최은희씨가 실종된다. 실종 사건의 배후로 의심 받기도 했던 신 감독 역시 6개월 뒤 최씨를 찾으러 간 홍콩에서 사라졌다. 북한 공작원에 의해 강제 납북이 밝혀진 것은 6년이나 지난 84년이었다.

북한 체류 시절, 신 감독은 그의 마니아였던 김정일의 지원으로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운영하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소금’ ‘불가사리’ ‘심청전’(1985) 등을 만들었다.

이 중 ‘소금’으로 최은희 씨는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돌아오지 않는 밀사’로 신 감독은 체코 카를로비바리영화제 감독상을 각각 받았다. 86년 신 감독 부부는 베를린 영화제 참석을 위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갔다가 미국대사관을 통해 극적인 탈북에 성공했다.

탈북 이후에도 신 감독의 영화 열정은 한결 같았다. KAL기 폭파 사건을 다룬 ‘마유미’(1990)와 김형욱 실종사건을 다룬 ‘증발’(1994)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스크린에 옮기는 대담한 창작 활동을 보여줬다.

2000년대 들어 급변하는 한국 영화시장에서 그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 갔지만, 끝내 메가폰을 놓지는 않았다. 2002년 치매 노인 문제를 다룬 신구 주연의 저예산 영화 ‘겨울 이야기’는 미개봉 유작으로 남았다.

2003년 안양신필름영화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동아방송대 석좌교수로 재직하는 등 말년에도 그는 변함없이 영화 현장을 지켰다.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남을 생각”이라고 소망하던 신 감독은 이제 하늘로 갔지만, 치열한 영화 사랑 정신은 이 땅에 남겨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은희 씨와 정균(영화감독)ㆍ상균(미국 거주)ㆍ명희ㆍ승리씨등 2남2녀가 있다. 12일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