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4월13일은 김구가 ‘마지막 주석’이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87주년이 된다.

4월15일은 북한에선 년호 태양절이 시작되는 그들의 ‘영생의 주석’ 김일성 탄생 94년이 되는 날이다.

또 1948년 4월20일은 임정의 김구 주석이 평양에서 열린 ‘조선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러 평양에 도착한 이튿날이다.

올해 4월7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는 나라사랑시민연대,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자유넷 등 ‘자유진영’ 청년단체들이 중심이 된 ‘라이트 코리아’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나라사랑시민연대 김경성 대표는 “36세의 김일성이 당당하게 걸어가는 뒤에 72세의 김구 선생이 초라하게 따라가는 사진은 김구 선생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진 철거할 것으로 믿는다. 만일 철거하지 않을 경우, 철거에 나설 것이다”고 했다. 철거 시한은 임정이 세워진 13일로 잡았다.

문제의 사진은 현재 기념관 2층에 걸려있는 두 장의 사진으로 1948년 4월22일 김일성의 안내로 연석회의장으로 가는 김구 한국독립당 당수의 모습이 담겨 있다. 2005년 9월 북한이 백범기념관에 전달해주도록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에게 요청한 것이다.

이 사진의 철거를 요구한 박상학 북한민주화운동 사무국장은 말했다. “어린 학생들이 그것을 보면 김일성을 김구 선생처럼 훌륭한 민족주의자로 잘못 인식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역사를 왜곡 전달할 우려가 있는 김일성 사진을 반드시 철거시키고야 말겠다.”

문제의 사진이 생긴 1948년 4월의 평양은 어떠했을까.

김구 주석은 북행을 막는 데모대를 피해 경교장(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뒷담을 넘어 4월19일 평양에 갔다.

김일성과 김두봉(북한 인민회의 의장)이 김구를 20일 예방했다. 그때 평양에 주둔하던 소비에트군의 정치위원이며 정보참모인 레베데프 중장은 비망록을 남겼다.

김구는 대표자 연석회의 주석단에 참여할 뜻이 없음을 김일성에게 알리며 단독회담을 요구했다.

김구: 나는 김일성과 단독회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김일성: 우리의 근본과제는 독립이다. 당의 대표는 회의에 참여해야 한다.
김구: 나는 주석단에 들어가지 않겠다. 단독회담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는 분단 문
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김구는 연석회의 2일째인 21일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날 그는 김일성을 비공식적으로 단독으로 만났다.

김일성: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김구: 나는 정치범(조만식 등) 석방, 38선 철폐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다. 내가 어떻게 총선거를 실시하는데 동의하는 서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한독당은 비법적(非法的) 위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4월19일~23일까지 열렸던 대표자 연석회의는 25일, 30일 1,2차 4김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을 끝으로 ‘남북 조선 정당·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냈다.

김구 주석의 ‘백범일지’를 주해한 창원대 인문대 사학과 도진순 교수(1958년생,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는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 김구시대의 정치사’(1997년 나옴)에서 이 연석회의를 요약했다.

”태평양전쟁(1941년)이후 김구는 임시정부와 항일의 확대를 위해 우선 중국 관내지방의 김원봉· 민족혁명당 세력과 합작을 성사시키는 한편 김일성 세력과의 합작을 위해 사람을 만주로 파견한 바 있다. 즉 일제 말기 김구는 김일성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으며 친근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합작을 고려할 수 있는 그러한 관계였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는 여러 가지 역사적 한계를 지니지만, 민족분단의 긴박한 정세에 대처하여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성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사상과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단결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분단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도진순 교수는 김구의 민족주의에 대해 “내전 없이,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데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1969년 8월, 한국 전쟁을 치르고 내놓은 ‘김일성 동지의 혁명활동 략력’에서 1948년 4월을 해석했다.

”김일성 동지의 직접적인 발기에 의하여 진행된 1948년 ‘연석회의’는 남조선에서의 단독선거를 파탄시키고(…) 이 회의체에 참가한 남조선의 완고한 민족주의자들과 ‘우익정당의 거두들도 김일성 동지께서 제시하신 방침의 정당성과 그이의 영도 밑에 북반부에서 이루어진 모든 성과 등을 받들고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김구, 김일성 두 주석의 1948년 4월의 역사에 대한 해석 차이는 너무 넓다. ‘라이트 코리아’측은 사진을 가져온 정동영 전 장관, 도진순 교수들과 함께 두 주석의 ‘1948년 4월’에 대해 토론의 기회를 가진 후에 철거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