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한국 ‘어제와 오늘’ 칼럼 2000년 12월 21일자의 제목은 ‘노근리(NO GUN RI)의 상징’이었다. 1999년 9월 30일 AP 통신이 1950년 7월 26~29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발생한 미군의 피난민 학살 사건을 ‘노근리 학살’이라 보도한 후 세계 언론은 ‘NO GUN RI Massacre’라 명명했다.

‘어제와 오늘’ 칼럼은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세계 최선, 최고의 군대라는 미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 사건을 조사하라”고 미 육군부에 지시할 때 ‘No Keun-Ri’ 사건이라 이름 지었지만 세계 언론이 ‘NO GUN RI’라는 제목을 고수하는 이유를 썼다.

그것은 전쟁 행위에 있어 ‘베트남의 미라이 사건’ 같은 민간인 총격 학살이 재발하지 않기 위한 ‘NO GUN’(학살 총격이 없어야)의 상징성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미 국방부 조사단은 1년 4개월여의 조사 끝에 결론 내렸다. “총질한 군인들에게 명확한 상부 명령서나 구두 명령은 없었다. 사망, 부상한 피난민 숫자는 언론보도나 한국측 주장(248명 사망)처럼 많지 않다.”

해를 넘겨 2001년 1월 13일자에 워싱턴 포스트는 ‘NO GUN RI 유감’이란 사설에서 요약했다. “클린턴 정부가 노근리 사건을 ‘전면적 사과’ 대신 ‘유감’이라 표현한 것은 진솔한 행위가 아니다”고 했다.

미 국방부 조사단의 한국측 자문역이었던 이만열 교수(당시 숙명여대, 현 국사편찬위원장)는 “조사가 시작되면서 루이스 칼데라 미 육군장관이 ‘전쟁 범죄자는 시한에 관계없이 면책할 수 없다’고 공언한 이후 참석자들의 증언 회피, 번복이 빈발해 진실 파악에 애로가 있었다”고 말했다.

미 조사단 자문역이었던 한국전 참전용사이며 캘리포니아 출신 전 하원의원인 피트 맥클로스키는 조사 결론을 반박했다. “조사관의 결론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적어도 1명의 장교와 9명의 사병이 명령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조사단의 결론이 명령이 없었다고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미국측 자문역인 하버드 역사학 교수 어네스트 메이(‘역사의 오용’, ‘이상한 승리’의 저자)는 “노근리에 있던 군인들이 잘 지휘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위원들이 사건이 ‘심사숙고한 잔학행위’(사살 명령에 따른 학살)는 아니었다는 데 동의했다”고 경위 설명을 했다.

이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지난달 30일. AP 통신은 파산한 ‘노근리 유산’(1999년 10월 21일자 ‘어제와 오늘’)을 회복시킬 기사를 냈다. 이 사건 보도로 2000년 퓰리처상 탐사보도 부문에서 AP 통신 최초로 수상한 찰스 핸리, 마사 멘도자가 쓴 ‘1950년 피난민 죽음을 밝혀낼 편지가 발견되다’는 기사였다.

미 국방부 조사단은 “정확한 피난민 사살 명령은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하버드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미 국립문서 보관소 닉슨 파일 조사관인 사르 콘웨이 란츠가 당시의 주한 미 대사였던 존 무초가 딘 러스크 국무부 동북아 차관보에게 보낸 편지를 찾아낸 것이다.

"미국은 2차대전 후, 핵의 발전에 따라
이런 무고한 희생에 대해 담론을 시작
했다. 전쟁을 이기기 위해 잔혹한 행위
를 하는 것은 절대로 금지되어야 한다."

1950년 7월 25일자로 된 편지에서 무초는 해롤드 노블(‘이승만 박사와 미국 대사관’의 저자) 당시 주한 미 대사관 1등서기관 등이 참석한 한미 고위전략 협의에서 합의된 것을 썼다.

그 내용은 피난민들에 대해 미국 방어선에 접근하지 말 것을 ▲항공전단으로 경고 ▲경고사격 ▲경고사격에도 불구하고 접근한 경우 발포의 3단계 절차를 밟을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 문서를 찾아낸 콘웨이 란츠 박사는 “이 추가문건이 발견됨에 따라 노근리에 대해 미 국방부가 그동안 밝힌 주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고 내다봤다.

콘웨이 란츠 박사는 AP가 이 문서를 기사화하기 전인 지난 4월에 ‘전쟁에 뒤따른 피해(Collateral Damage)-2차대전 후의 미국인, 비전투요원의 면책 특권과 잔혹 행위’를 출간했다. 콘웨이 란츠 박사는 책의 서문에서 주장했다.

“우리는 매일 얼마나 많은 이라크인들이 죽어가는가의 숫자를 본다. 이들은 군인이 아니고 전쟁과는 상관없이 십자포화에 갇혀 희생된 무고한 서민이다. 그들은 ‘전쟁에 뒤따른 피해자’다.”

“미국은 2차대전 후, 핵의 발전에 따라 이런 무고한 희생에 대해 담론을 시작했다. 전쟁을 이기기 위해 잔혹한 행위를 하는 것은 절대 금지되어야 한다.”

책을 쓰면서 그는 미 국방부가 부인한 사살명령의 문서를 밝혀낼 수 있었다.

지금은 AP 통신을 떠나 인터내셔널 트리뷴 지에 서울특파원으로 일하는 2000년 퓰리처상 탐사보도 부문 공동 수상자인 최상훈(1962년생, ‘노근리 다리’의 공동 저자. 지난달 29일 나온 ‘한국의 목격자-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135년간 전쟁, 위기 뉴스’의 공동 편집자) 씨는 이번 문서 발견의 의의를 요약했다.

“1999년 AP가 이 사건을 보도할 때 1950년의 무차별 발포 승인 사실을 보여주는 문서가 있었다. 어떤 문서에는 ‘피난민들을 사냥감으로 보라’는 지시도 있었다. ‘밤에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보이면 누군지 묻지 말고 그냥 총격을 가하라. 총격을 가하지 않으면 중대장을 보직 해임한다’는 지시도 있었다.”

최 특파원은 AP는 문건을 19건을 확보했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문서가 있었고 콘웨이 란츠의 무초 편지도 사본이 있었을 것으로 내다봤다.

두 사람의 그동안 추적의 결론은 ‘전쟁에 뒤따른 피해’에 대한 미 국방부 당국의 재발 방지를 위한 각성과 반성이 없이는 ‘NO GUN’이라는 ‘노근리의 상징’은 이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