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층부터 “와르르” 순식간에 “생지옥”(서울신문)
○「삼풍」참사 현장/지하 3층까지 “폭삭”(조선일보)
○“피가 모자란다” 병원 아비규환(한겨레)
○ 피범벅… “밤새 아수라장”/“통곡의 바다” 병원 표정(국민일보)
○“대지진 난 줄 알았다”(서울신문)
○ 백화점 붕괴 “외인 아파트 폭파 해체 같았다"(동아일보)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0분 서초동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외벽만이 남은 채 폐허가 됐다.

건물이 무너져 내린 지 1시간이 지났는데도 콘크리트 더미 아래에서는 “살려 달라”는 비명이 새어나와 생지옥을 방불케 했으며 건물이 붕괴된 순간 콘크리트가 주저앉으면서 생긴 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붕괴 사고로 삼풍백화점이 처음은 아니다. 1970년의 서울 와우아파트, 1993년의 서울 성수대교가 무너져 2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마구 뒤섞여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돈 속에서 소중한 생명이 스러져 갔다.

이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백화점 주변 지역에 사는 가족 · 지인의 안부를 묻는 전화가 폭주하였다. 통화량이 평상시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나 서초구 일대는 극심한 혼란을 빚었다.

백화점 붕괴 사고 직후 영동세브란스·강남성모·순천향병원 등 강남 지역 20여 병원에는 밀려드는 환자들과 의료진으로 응급실은 물론 현관이나 병원 마당까지 가득 차 전쟁터의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병원들은 전 의료진을 동원해 부상자 치료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혈액이 모자라 응급환자 수술에 애를 먹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와 가족의 사망을 확인한 유가족들이 여기저기서 목메어 울고, 공중전화 등을 이용해 가족의 소재를 확인하는 일로 병원들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붕괴 사고가 있을 때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백화점이 무너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하였다. “대지진이 난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고 건물이 폭격맞거나 폭파 해체당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람도 있다. 건물 붕괴를 대지진이나 피폭(被爆)으로 혼동한 것이다.

한편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붕괴 10여 일 후에 구출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열하루 만의 최명석 씨, 열사흘 만의 유지환 씨, 열이레 만의 박승현 씨 등 삼풍 3인은 뒤엉킨 철근과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밤과 낮을 혼동해 가며 목숨을 지켜 내어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

이 큰 사고를 보며 ‘무서워’ 시리즈와 ‘부실·사고공화국’, ‘우째 이런 일이…’ 등 유행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서울의 호사스러운 소비 생활을 주도하다가 뿌연 연기 속에 사라져 수많은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안긴 삼풍백화점, 사망 501명, 부상자 939명 등 광복 이후의 단일 사고로는 최대 수치를 기록했다. 유가족은 순식간에 사라진 가족을 애타게 그리며 지금도 하늘에 편지를 부친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참사가 부실한 고속성장의 한계와 이윤 극대화 위주의 천민자본주의의 추악한 잔해를 보였다며 차후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고 여러 차례 촉구했다.

이후 11년. 지금은 어떤가. 혼돈에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크고 작은 사고에서 혼란과 혼동을 여전히 보이고 있으매 안타까울 따름이다.


김희진 국립국어원 국어진흥부장 hijin@mc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