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뉴욕대·정치학)는 6월 1일 출간된 이정식 박사(버클리대·정치학)의 ‘대한민국의 기원’을 아직 읽지 않은 듯하다.

이인수 박사는 9일 있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단체 모임’이 마련한 KBS 드라마 ‘서울 1945’의 역사왜곡을 항의하는 기자회견에서 얼굴을 붉혔다.

“마치 북한에서 대한민국을 헐뜯기 위해 제작한 드라마 같았다. (···) 미 군정과 오히려 대립관계에 있었던 이 전 대통령이 마치 미 군정의 앞잡이처럼 나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인수 박사가 이정식 박사의 책을 들어 1947년 7월 암살된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과 이승만 임정 주미외교부 위원장과의 역사적 관계를 설명했다면 기자회견은 훨씬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이정식 박사는 ‘해방 전후 한반도 국제정세와 민족지도자 4인의 정치적 궤적’이란 부제가 달린 ‘대한민국의 기원’ 책에서 이승만,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 4인의 민족지도자를 어느 책보다 실증적으로 분석, 해석, 비판하고 있다.

특히 여운형(1885-1947), 이승만(1875-1965)과의 관계는 여지껏 나온 해석이나 비평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을 오랫동안 알고 지낸 5명의 인사가 요약한 두 지도자의 개성과 인상은 흥미 이상이다. 1945년 9월께 함경북도 이원에서 월남한 28세의 강원룡(후에 크리스찬 아카데미 이사장·경동교회 목사)이 기독청년연합회 정치부장,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등으로 두 지도자를 가까이서 보고 느낀 인상은 날카롭다.

여운형에 대한 인상은 ▲마음이 열려 있고 ▲폭 넓은 사고를 지녔고 ▲잘 생긴 미남이고▲청중이 좋아하는 연사이고 ▲웅변적이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생각이 모호하고 ▲술수에 능하지 못하고 ▲가혹하지 못하고 ▲뒷심이 없고 ▲감동적인 연설을 하지만 내용이 없고 ▲남의 영향을 쉽게 받는 사람이었다.

강원룡의 이승만에 대한 인상도 올바른 것으로 느껴진다. 이승만은 ▲상황을 능숙하게 다루는 능력을 지녔고 ▲모든 것을 정치로 귀결시키고 ▲낙관적이고 ▲비교적 편협하고 ▲활달하고(1940년대에도 그는 40대 같았다) ▲충동적인 연설자였다.

이정식 박사는 이런 인상과 그가 1963년부터 펜실베니아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추적한 한국의 근·현대 정치사와 미국·일본과의 관계, 소련 공산당과의 관계를 추적한 사실(史實) 등을 종합해 4인의 지도자 유형을 찾아냈다.

호걸 정치인 여운형은 이승만을
고집스럽고 유아독존적이며
남 위에 군림하려는 인물로 봤다.

행위주의 정치학자로 유명한 해롤드 라스웰이 분석한 ‘정치적 유형’ 중 이승만은 ‘정치적 선동가형’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선동가’는 “대중의 감정적 반응을 중요시하고 자신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악마의 한 패거리라고 한다. 이러한 선동가는 평생을 목소리 높여 외치거나 선동적인 글을 쓰면서 열정을 정기적으로 분출해내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정식 박사는 “20세기의 세계사를 돌이켜보면 이런 인물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이승만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고 분석했다.

이런 이승만에 대한 여운형의 인상은 어떠했을까. 지난호 칼럼에 소개한 그의 둘째딸 여연구(1927-1996, 북한 조국전선 공동의장)는 ‘나의 아버지 여운형’ 책에서 적고 있다.

“10월 17일(1945년) 이승만의 환국은 복잡한 남조선 정세를 또 한번 흔들어 놓았다. 아버지는 이승만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상해 임정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를 독립운동 선배로 존중하려 했으나 너무 고집스럽고 유아독존적이어서 호흡을 맞출 수 없었다. 또 당시 안창호를 통해 재미동포들 속에서 신망이 없다는 말도 많이 들어 왔었다. 이왕가(李王家)의 후예라고 하는 이승만은 어디를 가나 장(長) 자리를 요구했고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였다.”

이정식 박사는 이승만에 대한 이런 인상을 가진 여운형의 지도자 형을 ‘상호작용 지향형’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유형의 인물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기원’에 나와있는 여운형에 대한 수식어는 “흉악한 정쟁의 바람에 쓰러진 호걸”이다.

이 박사는 그 이유를 적고 있다. “호걸이 되는 조건 중의 하나는 ‘풍모가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여운형은 풍채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을 현혹했다.”

“해방 후에 평양에서 조선노동당 조직부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했던 소련 출신의 박영빈도 ‘여운형은 호방한 성격과 준수한 용모로 대중의 인기가 많았다. 그는 사람을 사로잡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 그의 호탕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이 박사는 결론을 내고 있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해방 후의 정국은 여운형 같이 순진하고 호방한 호걸이 나설 수 있는 마당이 아니었다. 그 마당은 냉정하고 치밀한 정치인들의 잔혹한 싸움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이 호걸에 대해 45년 10월에 서울에 돌아온 후 그의 워싱턴 임정 대표부 대변인 격인 로버트 올리버 박사(시라큐스대·정치학, ‘이승만-신화에 가린 인물’저자)에게 편지를 썼다.

“여운형과 그의 동생 여운홍이 조선인민당 당수를 맡아달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들이 주장하는 연립에 동의하는 것이 되어 겉으로는 ‘당수’라는 외양을 갖추겠지만 실상은 그들의 포로가 되기 때문이다.”

치밀한 정치인 이승만은 여운형은 ‘열렬한 공산주의 전력자’며 ‘조선인민당은 공산주의자가 지배하고 있는 당’으로 봤다.

물론 이정식 박사의 책에는 여운형 암살의 배후 등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 KBS드라마 ‘서울 1945’의 PD와 작가들은 꼭 ‘대한민국의 기원’을 읽어보기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