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모더니스트 소설가로 꼽히는 구보(丘甫) 박태원(1909-1986)이 60년 10월 15일 평양의 국립문화 예술서적에서 낸 ‘임진조국전쟁’이 지난 4월 10일 서울의 출판사 깊은샘에서 다시 나왔을 때 파문은 없었다.

그러나 지난 6월 19일 제14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50년 평양에 간 박태원의 큰딸 선영(70) 씨가 여동생 소영(68), 남동생 재영(64) 씨 등을 만났을 때 파동은 일었다. 소영 씨의 아들이 2003년에 ‘살인의 추억’을 감독한 봉준호 임이 밝혀져서였다.

선영 씨는 동생들에게 자랑했다. “나도 북에서 영문학을 전공해 1997년까지 평양기계대학 영문학 교수로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손이 작아서 한 옥타브 이상 칠 수 없어서 피아노를 그만두고 영어 공부를 했다.” “준호라는 조카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애가 유명한 영화감독일 줄 몰랐다. 조카가 만든 영화를 한번 보고 싶다.”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왜 선영 씨는 박태원 집안에 예술가적 소질이 있다고 자랑하면서 “얘 조카야! 너희 외할아버지의 ‘갑오농민전쟁’, 그전에 나온 ‘임진조국전쟁’을 감독해 보려무나”고 부탁하지 않았을까.

정답이 될는지 모르겠다. 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는 박태원의 ‘임진조국전쟁’론에서 영화화의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작품은 ‘이충무공 행록’(1949년 박태원이 번역), ‘징비록’의 내용을 뼈대로 삼으면서 남쪽에서 연재했던 ‘임진왜란’(서울신문 1949년 1월 4일~12월 14일)의 다소 지리한 문장과 난삽한 인용에서 벗어나 7년에 걸친 전쟁의 전체상을 흥미진진하게 공간적으로 펼쳐내 보인다. 작품 전반에 걸쳐서 소설적 긴장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다기한 면모를 가진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요령껏 처리하면서 전쟁의 성격을 이순신과 인민의 전쟁으로 끌어가는 작가의 솜씨는 이 작품이 처음 출간되었던 60년 북한이라는 시공간적 제약을 쉽게 의식하지(남로당원 숙청, 주체외교) 못하게 하는 완성미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

방민호 교수는 ‘임진조국전쟁’의 주역인 이순식의 죽음을 처리한 장면을 이 소설이 차지하는 남북의 이데올로기를 떠난 문학적 핵심으로 봤다.

“이순신의 죽음에 아무런 주석도 붙이지 않고 작품을 마무리 지으면서 필경 거기서 항우의 최후와 같은 깊은 허무(‘해하의 일야’: 동아일보에 1929년 12월 17일-24일까지 연재한 초나라 항우의 죽음 이야기)를 맛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칼의 노래(2001)’의 작가 김훈(1948년생, 한국일보 문학기행 담당 기자 역임)의 무상과 허무에 이어지는 성질의 것이리라.”

아무런 주석도 달지 않은 죽음의 현장(1588년 무술년 11월 19일 새벽 남해섬 앞 노량해전)을 ‘임진조국전쟁’에서 본다.

<이순신은 악다구니 끓듯 하는 적선들 사이를 동쪽으로 배를 달리며 손수 북채를 들고 싸움을 재촉하였다. 좌우에 활을 든 맏아들 회(35세)와 칼을 짚은 조카 완(20세)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뫼시고 섰다. 싸우고 또 싸워 어느덧 먼동이 훤히 틀 무렵인데 분투 화광 속에 한 곳을 바라보며 진린(명의 해군도독)이 타고 있는 명나라 대장선이 왜선들의 포위 속에 들어가 형세가 자못 위급하다.

이순신은 곧 염을 내서 그 편으로 배를 모아 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때 어디에선가 날아든 총탄 하나가 그의 왼편 가슴을 꿰뚫었다.

“앗!”

짧고 날카로운 부르짖음과 함께 이순신은 북채를 손에 잡은 채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앗 아버님!”

“작은 아버님!”

회와 완은 소스라쳐 놀라 일시에 외치면 좌우에서 달려들어 그의 몸을 안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손을 저어 이를 멈추고,

“방패… 방패로 나를 가려다오…”

괴로운 숨결 아래서 내리는 분부였다. 아들 회가 그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즉시 곁에 놓인 방패를 가져다가 쓰러져 있는 부친의 몸을 왜적들의 눈으로부터, 또 우리 장병들의 눈으로부터 가리어 놓았다.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아는 이순신은 다시 한마디.

“싸움이… 지금 한창 고비니… 나, 나 죽었단 말… 말아라.”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그대로 숨이 다하였다. 향년이 오십사 세다.>

방민호 교수는 이순신의 죽음에서 박
태원과 그보다 39세 아래인 김훈이 느
꼈던 것은 무상과 허무라고 해석했다.

박태원이 ‘주석 없는 죽음’을 그린 지 4년 후, 작가 김훈은 이순신을 자기 삼아 그의 죽음에 주석을 달았다. 해석을 했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렸다. 송희립은 나를 선실 안으로 옮겼다. 고통은 오래 전부터 내 몸 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 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내 갑옷을 벗기면서 송희립은 울었다.

-나으리 총알은 깊지 않사옵니다.

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총알은 임진년 총알(임진년 13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왼쪽 어깨에 총상)보다 훨씬 더 깊이 제자리를 찾아서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몸은 희미했고 몸은 멀었고 몸은 통제되지 않았다.>

방민호 교수는 이순신의 죽음에서 박태원과 그보다 39세 아래인 김훈이 느꼈던 것은 무상과 허무라고 해석했다.

봉준호 영화감독은 방민호 교수의 자문을 얻어 이순신의 죽음을 그린 ‘노량의 추억’을 영화화했으면 한다. 그건 외할아버지 박태원에게 바치는 헌사가 될 것이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