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1886. 4. 22 ~ 1947. 7. 19) 선생 59주기 추도식이 7월 19일 정오 서울 강북구 우이동 옛 태봉 묘소에서 열렸다. 몽양의 자녀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여원구(79)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겸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또한 1997년 50주기 때 추도사를 쓰고 몽양 기념전집 출판위원장을 맡았던 크리스찬 아카데미, 평화포럼 이사장 강원용 목사(1917년생, 1947년 여운형이 의장이었던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5, 10주기를 선호하는 풍습 때문일 것이다. 2007년 7월 60주기에는 여원구 의장과 90세를 맞는 강 목사가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덧붙여 그때에는 대선에 나설 여러 정치인이 참석해 몽양 여운형을 추도하는 소견을 피력했으면 좋겠다.

강 목사의 97년 추도사에 그 이유가 담겨 있다.

<저는 선생님께(47년 1월께) “선생님이 30년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뜻 있는 다수의 지도자들이 선생님의 높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란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자네들이 있는데 내가 꼭 있어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50년이 되는 오늘도, 개방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자세로 통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시던 선생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늘 선생님의 50주년 추도식도 전 국민적인 참여 속에서 하지 못하게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50년 전 철없는 한 청년의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셨다기보다는 철저한 흑백논리에 좌우되어 좌익이 아니면 우익, 미국이 아니면 소련이라는 양자택일만이 용납되던 상황 속에서 선생님이 서실 수 있는 자리가 너무도 좁았기 때문에 이 땅을 뜨신 것 입니다. (···)>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이 목숨 바쳐 사랑한 우리의 조국은 이 밤중 같은 어둠을 헤치고 동트는 새벽과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을 반드시 맞이할 것으로 믿습니다. 서로의 차이점을 대결이 아닌 화해로 승화시키려 했던 선생님의 염원처럼 남북한, 영남, 호남, 충청, 수도권이 모두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함께 사는 그 역사의 동이 터올 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선생님이 60주기를 맞이할 때는 추도사를 하고 있는 저 자신을 포함해 여기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 선생님 곁으로 가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날은 우리 후배들이 이룬 통일된 조국에서 선생님의 60주기가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지기를 바라면서, 부끄러운 마음을 달래며 추모의 인사를 마감합니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화합을 모색하려면
다른 점은 다르게 보면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열린 눈과 넓은 마음이 필요하
다. 여운형은 그런 인물이었던 것 같다"

몽양과 강 목사의 나이 차이는 31년. 몽양이 피살된 47년에 강 목사가 30세였으니 내년에 90세가 된다.

10년 전 강 목사는 2007년인 내년에는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2006년의 현실은 어떤가. 강 목사는 1997년 80세 때의 낙관이 세기가 바뀌어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2002년 몽양 기념사업회 고문이사를 맡으면서 느꼈다. 또 ‘역사의 언덕에서-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 체험’이란 5권짜리 회고록을 쓰면서 더욱 실감했다.

<내가 이 글(회고록)을 쓰는 2002년에 그가 우리 정계 속에 살아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현재 남북한을 막론하고 한국 정치계에 이런 인물이 있다면 우리 역사는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고 정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본받을 점이 많은 인물이 바로 몽양 여운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선 그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 남쪽과 북쪽의 갈등, 세대 간 간격과 지역 갈등을 넘어서서 전 민족을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향한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될 사람은 닫힌 인간 즉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색깔론, 지방색을 이용하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 활짝 열린 인간, 모든 세력을 결집시킬 줄 아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 지도자의 출현을 갈망할 때마다 몇몇 내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몽양이다.>

강 목사가 몽양의 50주기 추도사를 한 97년, 회고록을 쓴 2002년은 대선 후보가 결정되는 때였다. 새로운 지도자가 떠오르고 그해 12월의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때다. 내년 대선도 몽양의 60주기 행사 후에 치뤄진다. 강 목사의 바람은 ‘닫힌 인간’이 아닌 ‘열린 인간’이 새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강 목사는 그의 나이 30세 때인 47년 7월 맞은 몽양의 죽음을 보며 회고했다.

<여운형은 열린 인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외눈박이가 되어 사람과 세상을 보았다. 빨갱이의 눈 아니면 극우파의 눈으로밖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화합을 모색하려면 다른 점은 다르게 보면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열린 눈과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여운형은 그런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외눈박이 소인배들이 어지럽게 설쳐대는 그 시대에서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좌익 외눈박이들도 그를 껄끄러워 했고, 우익 외눈박이들도 불편해 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우리나라가 남북통일을 하고 세계 속의 한국이 될 경우 과거 인물 속에서 지도자 모델을 굳이 찾으려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여운형이 그 모델감이다”고 말할 것이다.>

대통령이 되고 싶은 꿈을 가진 사람들은 강 목사의 ‘역사의 언덕에서’를 꼭 읽기를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