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1875-1965)의 기일(忌日)을 깜박했다. 7월 19일은 41주기였는데 몽양 여운형(1886-1947)의 죽음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초대 대통령이 80세를 맞은 1955년 3월 26일 서울 운동장에서 ‘해피 버스데이 아우어 프레지던트’를 합창했던 그때 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필자로서는 ‘왜 그랬을까’라는 물음이 뒤따랐다.

해답이 될는지 모르겠다. 지난번 소개한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1950년대편 2권’에는 “세계를 경악시킨 반공포로 석방’이란 대목이 2쪽 반 나와 있다.

휴전 조약이 막바지에 이른 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급조한 국방부 헌병총사령관 원용덕과 특무부대장에게 북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했다. 3만 4,000명 중 2만 7,000명이 대구, 영천, 부산, 마산, 광주, 논산, 부평 등지에서 석방됐다.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미국은 우방을 잃는 대신 적을 하나 더 얻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퇴임 후 회고록 ‘백악관 시절’에 “8년 대통령 재임 중 자다가 일어난 것은 그때가 유일하다”고 썼다.

그때 영국의 총리는 45년 8월 전승하고도 물러났다가 다시 재집권한 윈스턴 처칠(1874년 11월-1965년 1월). 그는 이승만을 ‘배반자’라고 비난했다. (외무부 구아국장, 필리핀 대사 등을 지낸 김창훈(파리대학 법학박사)은 2002년 7월에 낸 ‘한국 외교 어제와 오늘’에서 이때를 적고 있다.)

처칠은 미국에게 “비밀리에 이승만을 구속하거나 대통령 직에서 쫓아내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은 이에 대해 “그 늙은이는 아편전쟁(1839-42년 영국과 청나라 간에 아편·차의 수출입을 둘러싸고 벌인 제국전쟁)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이라고 비아냥댔다. ‘그 늙은이’는 그때 이승만보다 4개월여 먼저 태어난 79세였고 그는 78세였다.

4개월 후가 4개월 전을 ‘늙은이’라 할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처칠은 이승만과 같은 해인 1965년 1월 24일 세상을 떴다. 향년 91세. 이승만은 그해 7월 19일 하와이 마우나라니 노인병원에서 숨졌다. 향년 90세.

그러나 그런 비아냥은 커다란 차이를 낳았다.

영국의 처칠 연구사학자인 존 렘스덴은 3,000여 종에 달하는 처칠 연구서를 섭렵 끝에 그를 ‘세기의 영웅’(Men of the century)이라고 결론짓는 책을 2002년에 냈다.

65년 1월 16일자에 처칠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기사가 나온 후, 그의 사저가 있는 하이드 파크에는 춥고 간간이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웅성거리는 군중’을 이뤘다.

<군중은 잡다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슬픈 얼굴의 인도인도 있었고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미국인도 있었다. 처칠이라는 이름을 하나의 전설로 간직한 장발 소년과 단발 소녀도 있었다. 점잖은 복장에 밤샘을 하려는 듯한 자세로 서 있는 중년 신사와 처칠을 칭송하며 전쟁 중의 업적을 말해주는 노인도 있었다.>

"우리는 여기 살러 온 사람이 아니오.
마미, 잠시 쉬러 온 거야.
우리는 서울로 돌아가야 해"

이승만의 65년 1월은 어땠을까. DJ 정부 때 노사정 위원장, 노동부 장관을 지낸 김호진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 4월에 나온 ‘대통령과 리더십’에서 쓸쓸했던 이승만의 하와이 생활을 그렸다.

<“마미(부인 프란체스카의 애칭), 밥그릇 가져다 준 사람, 숟가락 가져다 준 사람, 찻잔 가지고 온 사람, 식탁 가져온 사람, 책상 가지고 온 사람··· 다 기억해야 돼. 깨끗이 쓰고 서울로 돌아갈 때는 돌려줘야 하니까.

우리는 여기 살러 온 사람이 아니오. 마미, 잠시 쉬러 온 거야. 우리는 서울로 돌아가야 해.”

“파파, 오늘이 일주일치 식료를 사오는 날이예요. 시장 다녀 올게요.”
“오늘이 금요일인가? ··· 마미, 이번주에는 식료품 안 사면 안 되겠어? 장보러 가지 말아. 돈을 아껴야지. 돈이 있어야 서울로 돌아갈 수 있소. 마미.”
“파파, 서울 가는 비행기표 사려고 먹을 것 안 먹고 굶으면 힘이 없어 어떻게 비행기를 타겠어요.”
“그러면 조금만 사와. 돈 다 써버리면 서울 못가.”> (김광수 ‘역사에 남기고 싶은 열망’에서 인용)

90세의 ‘늙은이’는 아이와 같았고 그보다 25세 젊은 프란체스카는 어머니 같은 대화다.

김 교수는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승만 부부의 청빈과 검약은 당시의 한국인들에게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독재자의 이미지와 언론 통제가 그것을 가렸기 때문이다.”

독일의 정치학자 크리스티안 그라프 몬 크로코는 99년에 독일어로 ‘처칠, 세기의 인물’을 냈다. 히틀러 시대에 성장한 크로코 교수는 처칠의 인생을 ‘늙은이’로 보지 않았다. ‘독재자(히틀러)에 맞서 싸우는 모범적 상대자’로 봤다.

크로코 교수는 결론 내렸다. “끔찍한 공포로 인해 피 냄새가 가득한 20세기 말에 우리는 이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해야 한다. 궁핍한 시절에, 독재가 이길 것 같던 시절에,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시절에 그는 자유의 깃발을 움켜쥐고 백전불굴의 정신으로 승리를 향해 나아갔던 것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기일을 잊었던 사람들과 이승만이 ‘늙은이’라고 비아냥 댄 윈스턴 처칠을 알고픈 사람들은 김호진 교수의 ‘대통령과 리더십’, 존 렘스덴 교수의 ‘처칠, 세기의 영웅’(2004년, 을유문화사)을 읽어보길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