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한을 우승으로 승화시킨 슬픈 올림픽의 승리자. 그는 한국인의 민족 영웅이자 지구촌 체육인의 자랑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영원히 달린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70주년을 기념하는 고(故) 손기정 선생의 동상 받침대에 새겨진 글이다. 높이 2.5m의 이 동상은 손 선수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건각들을 제치고 베를린 스타디움의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하는 순간을 재현했다. 온 힘을 다하여 달리는 모습에서 우승의 벅찬 감격을 읽어 낼 수 있다. 당시 일장기가 달렸던 가슴엔 태극기를 새겨 넣었다.

동상에서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꿔 새긴 일을 계기로, 우리가 쓰는 말 속에 혹 일장기가 여전히 붙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자.(주목할 대목에 밑줄을 침. 이하 같음.)

① 이조시대부터 안마사와 침술, 복술업(卜術業)은 시각장애인의 직업이었다. (ㅅ신문, 6. 12.)

② 도올의 증조부인 김중현은 궁정수비대에 근무하다가 임오군란 때 불타는 궁정에서 나인 옷을 입은 민비를 업고 나왔다. (ㅎ신문, 5. 19.)

①의 ‘이조’ 또는 이의 본딧말 ‘이씨왕조’와 ②의 ‘민비’는 우리 국호와 국모의 권위와 격을 떨어뜨리려고 일본이 만들어 낸 말이다. ‘이조’는 ‘조선왕조’ · ‘조선조’로, ‘민비’는 ‘명성황후’로 각각 바꿔 써야 한다. ‘이조’와 ‘시대’가 결합한 ‘이조시대’가 ‘조선시대’가 됨은 물론이다. ‘민비’와 결합해 쓰였던 ‘민비 시해사건’ · ‘민비 살해사건’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고쳐 부른다.

③ 해방 61주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연대집회가 9일 정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ㅅ신문, 8. 9.)

‘해방(解放)’은 노예 해방, 약소민족 해방, 여성 해방처럼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다. ‘광복(光復)’은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는 일”이다. 두 말의 차이는 뭘까. 강자가 약자를 손아귀에 넣어 움켜쥐었다가 놓아 주는 일이 ‘해방’이라면, 남의 통제 속에 있다가 자신의 힘으로 주권을 쟁취하는 일이 ‘광복’이다.

우리는 압제에서 놓여난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을 당당히 찾아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8월 15일은 ‘해방된 날’이 아니라 ‘광복한 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밖에도 ‘헤이그 밀사사건(密使事件)’은 ‘헤이그 특사파견’(1907)으로, ‘한일합방’은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로, ‘6·10만세사건’은 ‘6·10만세운동’(1926)으로, ‘광주학생사건’은 ‘광주학생 항일운동’(1929)’으로, ‘일제시대’는 ‘일제 강점기’로 부르기로 한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는 우리 자리에서 우리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한다. 일장기, 어두웠던 시절의 그 그림자를 우리의 말 속에서 걷어 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김희진 국립국어원 국어진흥부장 hijin@mct.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