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때 A급(전범)이 합사되고 게다가 마쓰오카 요스케(1880-1948.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 일본 수석대표로 만주 문제로 국제연맹서 탈퇴. 1940년 외무대신으로 독일, 이탈리아와 조국동맹 추진. 1946년 A급 전범으로 옥중 병사)까지 포함됐다고 들었지만, 마쓰다이라 쓰네오(1877-1949, 주영 대사)의 자식인 지금 궁사(절의 주지에 해당)는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그렇게 쉽게··· 마쓰다이라(부친)는 평화에 강한 열망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 참배하지 않았다. 그게 ‘내 마음’이다.”

이는 히로히토 일왕(1901-89)이 죽기 1년 전인 1988년 도미다 도모히코 궁내청 장관이 그와의 대화를 직접 기록한 메모다. 도미다는 궁내청 차장 때인 1975-86년에 일기 각 1권, 1986-97년에 수첩 20권을 남겼다. 89년 일왕이 죽자 원문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가 되어 8·15 패전일 신사참배를 공약한 후 여러 비평가들에게서 이야기가 있었다.

특히 2005년 9월 고이즈미가 중의원 선거에서 대승한 후 나온 후지와라 하지메(1938년생. 프랑스 그루노블대 지질학 박사. 석유개발업 컨설턴트. 미국 LA 거주)가 쓴 ‘고이즈미와 일본광기와 망령의 질주’(2006년 6월 황영식 전 한국일보 일본특파원 번역으로 나옴)에는 히로히토 일왕의 A급 전범 14명 합사에 대한 분노가 나온다.

후지와라 박사에 의하면 마쓰다이라의 장남 나가요시(1915-2005)는 해군기관학교를 나와 전쟁 중 해군장교로 복무하다가 전후 자위대 소령이 되었다가 은퇴, 궁사가 되었다.

‘고이즈미와 일본광기···’에는 나가요시가 78년 10월 독단적 A급 전범 합사에 나선 것에 대한 일왕의 분노가 적혀 있다. “이 합사 강행을 알고 격노한 히로히토 천황은 그 이후 봄 가을 대제 참배를 중지해 황실과 야스쿠니 신사의 관계가 위태롭게 됐다. 사실 그 후에 천황가는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일절 입을 닫고 있다.”

후지와라 박사는 히로히토가 참배를 거부한 78년에 고이즈미 의원의 행방을 추적했다. “1978년 말은 고이즈미가 사사한 후쿠다 다케오 정권의 말기였다. 따라서 젊은 시절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어떤 형태로 합사에 관여했던지를 조사해 보는 것은 상황 증거로써 흥미로운 주제이지 않을까. 고이즈미의 아버지 준야는 기시 노부스케로 이어지는 익찬 정치가였고 또 방위장관을 지낸 방위족이다. 더욱이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군인 유족연금을 주요 관할 업무로 하고 있던 후생성의 장관을 여러 차례 지냈다.”

이런 고이즈미는 히로히토의 신사참배 거부의 메모가 보도된(7월 20일자 니혼게이자이 신문) 후인 8월 3일 그의 이메일 위클리에 심정을 썼다.

“(야스쿠니 참배는) ‘마음’의 문제이며 강제 받는 것은 아니다.”

“취임 후 매년 한 차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것은 ‘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히로히토가 참배하지 않은 건 "그게 '내 마
음'이다"고 한 것과 20여 년 후 고이즈미가
참배한 건 "'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는 것 사이에는 넓고 높은 장벽이 있다.

히로히토가 참배하지 않은 건 “그게 ‘내 마음’이다”고 한 것과 20여 년 후 고이즈미가 참배한 건 “‘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는 것 사이에는 넓고 높은 장벽이 있다.

뉴욕타임스는 7월 22일자 사설에서 천황과 총리의 두 마음을 ‘지도자들의 마음속’이란 제목으로 풀이했다.

“교수형을 받은 7명을 포함한 14명의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고이즈미의 연례적 참배는 ‘파렴치한 우파 영합행위’로 이는 중국, 한국 등 일제 피해국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다수의 내국인들까지도 총리가 옛 군국주의를 포용하고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히로히토의 ‘내 마음’에 대해서는 칭찬했다. “참배 중단을 ‘나의 마음속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말한 히로히토는 3국동맹의 전쟁을 일으킨 제국 시대가 낳은 나이 지긋한 천황이지만, ‘현대 개혁주의자, 국제지도자, 엘비스 팬’을 자처하는 총리보다 ‘옳은 일을 할 마음속 여유’를 더 많이 지녔던 것 같다”고.

일본의 아사히 신문도 8월 4일자 ‘야스쿠니 참배에 나서는 총리의 한심한 논법’이란 사설에서 그를 비판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왜 야스쿠니에 참배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을 한 적이 없다. 더욱 아시아와 일본에 수많은 희생자를 낸 것에 대해 논의한 적도 없다.”

“무엇보다 전후 일본이 전쟁에 대한 책임과 잘못을 인정한 속에 건국되었음을 야스쿠니에 방문하면서도 무시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참배를 반대하는 것이다.”

“히로히토 천황의 메모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14명의 A급 전범자 합사에 대해 고민하고 참배를 중단한 이유를 알려준다. 그는 참배가 국민의 통합을 저해하고 나아가 중국 등 피해국이 비판에 나설 것을 미리 차단한 것이다.”

이런 여론에도 고이즈미 총리는 8월 8일 저녁 때에 기자들에게 밝혔다. “8·15 패전일 야스쿠니 참배는 총리 공약이었다.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8·15 참배는 적절히 판단해 하겠다.”

아직도 고이즈미는 히로히토의 ‘내 마음’을 읽어내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일보가 요미우리신문과 함께 실시한 한·일 국민의식 조사(8월 7일자 한국일보. 대상 한국인 1,000명, 일본인 1,867명)에서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양국의 여론 결과가 나왔다. ▲한국에서는 ‘참배해선 안된다’가 85.8% ▲일본에선 59.8%가 찬성했다.

그러나 8일 열린 각료회의에서 19명 장관 중(4명 해외출장) 2명만이 8·15 참배, 13명이 불참 의사를 밝혔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5년 10월에 나온 도쿄대학원 종합문화과 교수 다카하시 데스야(1956년생. 도쿄대학 박사)의 ‘야스쿠니 문제’에서 밝힌 다음 대목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야스쿠니 논리의 본질은 전사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그 슬픔을 정반대의 기쁨으로 전환하려는 것.”

“그것은 본질적으로 슬픔이나 아픔의 공유, 즉 추도나 애도가 아니라 전사를 기리어 칭찬하고 미화하면서 공적이나 내세워 뒤따라야 할 모범이라고 하는 것, 즉 현창(顯彰)인 것이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