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문학상 수상 터키 오르한 파묵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됐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시체’ 엘레강스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독특한 도입부로 지구촌 독자들의 뇌리에 널리 각인된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의 작가 오르한 파묵(54ㆍ터키)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12일(현지시간) “그는 고향 이스탄불의 우울한 영혼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문화 간 충돌과 얽힘에 대한 새로운 상징들을 찾아냈다”고 파묵을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파묵은 단지 역대 수상자들에 비해 너무 ‘젊기’ 때문에 노벨문학상을 주기 곤란하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이른 나이에 커다란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가다.

어린 시절 화가를 꿈꿨고 대학에서는 건축과 저널리즘을 공부한 특이한 전력의 그는 1979년 첫 소설을 낸 뒤 불과 세 번째 작품(‘하얀 성’, 1985년) 만에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 작품은 10여 개 국어로 번역됐을 뿐 아니라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터키 역사상 최대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새로운 인생’(94년)을 거쳐 98년 내놓은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으로 단숨에 현존하는 최고 작가 중 한 명으로 주목받게 됐다. 35개국 언어로 번역된 ‘내 이름의…’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예술가들의 생을 치밀한 필치로 묘사해 ‘다큐멘터리를 능가하는 이슬람 회화사의 생생한 기록’이라는 극찬을 들은 작품이다.

작가로서는 비교적 짧은 삶 속에서 파묵이 이처럼 기념비적인 결실을 잇달아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치열한 작가 정신과 수도승 같은 끈기라는 게 그의 ‘친구’ 이난아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평이다. 파묵은 유명세를 얻은 뒤에도 매일 10시간씩 책상머리에 앉아 집필에 몰두하는 생활을 어기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는 초창기에는 전통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소설을 주로 썼으나 이후 패러디, 알레고리, 초현실주의 등 기존 틀을 해체하는 실험적 작품으로 ‘진화’해 왔다. 이 때문에 파묵은 전위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일가를 이룬 보르헤스와 나보코프에 비견되기도 한다.

지난해 대산문화재단 초청으로 방한했을 때 파묵은 자신의 소설 세계에 대해 “나의 소설은 현실과 영원 속의 상상력을 합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동양과 서양의 접합점이면서 그 어느쪽에도 합일되지 못하는 조국 터키의 현실을 뛰어넘는 작품 세계를 열어 제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현실보다 영원을 지향하는 그 상상력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는 지난해 스위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과거 터키가 쿠르드인과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사실을 과감히 지적했다가 국가모독죄로 검찰에 기소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조국 터키에 대한 그의 속 깊은 애정을 터키인 그 누가 모를 것인가. 오히려 그들은 민족주의의 굴레를 벗고 세계의 양심을 대변한 파묵을 마음 속으로 끌어안았을 것이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