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미사일 발사 후 40여 일 만에 공식 석상에 나타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번 ‘핵실험 사변’ 후에는 언제 모습을 드러낼까?

다가오는 유엔 경제제재가 끝난 후일까. 미국 중간선거가 끝나는 11월 17일 이후일까.

김 위원장은 기다릴 것만 아니다. 스스로 성명을 발표하기가 어렵다면 좋은 방법이 있다. 아버지가 1990년대 초반 제1차 핵위기 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세 차례나 편지를 보낸 끝에 위기를 해결한 전례를 따랐으면 한다.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카터 전 대통령(1924년생. 1977~81년 재임)은 10월 11일(현지 시간) 핵실험이 있은 후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다. ‘한반도에서의 고착 상태를 풀기 위해 한꺼번에 한 발짝씩 나가자’는 제목이었다.

카터는 94년 6월의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을 회고하면서 주장했다. <“그때(94년)에도 지금처럼 전운이 감돌았다. 북한은 20만 발의 폭탄과 미사일을 서울에 퍼붓고도 패배한다는 것이 대세였다. 그때 주한미군 사령관 게리 럭 장군은 피해자는 한국전쟁 때를 능가하는 수백만 명이 될 것이다고 했다. (···)

나는 클린턴 대통령의 승인 아래 김일성 대통령(주석을 그렇게 불렀다)의 초청으로 북한에 갔다. 영변의 핵발전소에서 행해지고 있는 핵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이 핵 연료 추출을 항시 감시하도록 한다는 데 합의했다. 미국 등은 2기의 경수로를 제공하며 핵 연료 폐기로 입은 피해 보상으로 오일을 제공키로 했다. 무엇보다 미국은 북한에 핵 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었다. (···)

2002년 들어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 국가로 지목했고 오일 제공과 경수로 건설을 중단했다. (···) 평양은 IAEA를 탈퇴했고 핵무기 제조에 나섰다. (···)

여러 가지 해결 방법이 논의되지만 나는 미국이 북·미 직접대화는 흉계가 된다는 원칙을 떠나 믿을 만한 특사를 보내 비밀대화를 가지기를 권고한다. 그 특사로 전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공화·민주 양당 외교정책위 공동의장. 부시1세 정부. 국무장관)를 천거한다. 그는 이라크에서의 정책 변화를 기대하며 10월 초순께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적대국과 대화를 하는 것은 유화(appeasement)가 아니다”고.>

김 위원장은 또 한 사람의 노벨 수상자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 2000년 6·15 정상회담을 가진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김 전 대통령은 10월 13일 뉴스위크 기자들과 40여 분간 가진 인터뷰에서 ‘핵 사변’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했다.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가 제목이다.

<“유엔이 제재 결의를 한다 해도 나는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미국이 북한은 악마이기 때문에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필요하다면 악마와도 대화해야 한다. 과거에 닉슨 대통령은 중국에서 마오쩌뚱과 이야기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비에트를 ‘악의 제국’이라면서도 대화를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6·25 전쟁 중에 평양측과 이야기를 나눠 한반도에 50년간 평화가 있게 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세계 평화에 책임 있는 미국이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는 한·미 간 북한 문제에 대해 협조가 잘 되었다. 백악관을 떠난 수년 후 청와대를 찾은 클린턴은 말했다. ‘1년만 더 대통령을 했으면 북한 문제는 완전히 해결됐을 텐데. 그렇게 안돼 미안합니다.’ 나는 그에게 동의 했다.” (···)

“2001년(3월) 백악관에 갔을 때 부시 대통령은 공동기자 회견에서 정상회담에서 나눈 대화와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북한은 자기 국민을 굶어 죽게 하면서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고. 나는 콜린 파월과 백악관에 가기 전에 ‘클린턴의 포용정책을 계속 하겠다’는 데 합의했었다. 만약 부시가 클린턴의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면 오늘의 사태가 있었을까” (···)

- 당신은 1994년 핵 위기 때 카터가 북한으로 특사로 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카터는 북한에 갔고 성공했다. 카터는 제임스 베이커 전 장관을 이번 사태의 특사로 지목했다. 어떻게 생각하나.(뉴스위크 기자의 질문)

“미국정부가 높이 신임하는 베이커 같은 분이 가야 한다. 그 전제는 부시 대통령이 무력과 제재보다 대화로 풀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 북한은 아직도(실험 성공 후) 그들의 안보가 보장된다면 핵을 폐기하겠다고 한다. 이런 결심의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그런 바람도 있다.”

카터가 94년 북한 방문을 마치고 워싱턴에 돌아오자 그는 2차대전 때 유화정책을 편 영국 수상 ‘네빈 챔버린’이요, 그의 제안을 수용한 클린턴은 ‘지미 클린턴’이란 야유를 받았다.

그러나 카터는 평화를 바란다면 “황제에게는 황제의 것을, 하느님에게는 하느님의 것을 주면 평화가 온다”고 한 예수의 말을 인용해 “대화로 문제를 풀라”고 설교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카터, 김대중 두 노벨평화상 수상자에게 “미국 특사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써야 한다.


박용배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