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남재희 전 서울신문 편집국장이 지난 10월 2일 ‘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을 냈다.

연합통신의 서평란의 제목(10월 11일자)은 “남재희 전 장관의 ‘아주 사적인···’”이었다.

‘20년 언론인’, ‘20년 정치인’인 1934년생 남 국장의 이번 회고록을 굳히 ‘언론인 남재희’로 표현하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 그것이 그의 ‘정치 비망록’인데도.

필자는 주간한국 2004년 12월 23일자에 ‘어제와 오늘’에 79세를 넘기며 낸 그의 회상록 ‘언론·정치 풍속사-나의 문주(文酒) 40년’에 대한 느낌을 썼다. ‘40년 독자와 저자’라는 제목으로 필자는 그가 80세를 향해 가는 언론인의 전진(戰進-전쟁터로 가!)을 썼다. 이번 회고록에는 ‘20년 언론인’의 기사와 논평을 통한 싸움이 ‘후 20년 정치 비망록’에 알알이 박혀 ‘꽃’이 되었다고 느꼈다.

그는 YS 문민정부 때 노동부 장관(1993~94년), 79년 제 10대 국회의원으로 4선이 될 때까지 공화·민정· 한나라당의 주요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58년 한국일보 견습 7기로 출발, 편집부 기자를 거쳐 민국·조선일보(1962~72년) 기자, 문화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72~78년까지는 서울신문 편집국장, 이사, 주필을 거쳤다.

‘아주 사적인···’에는 “공격을 받아도 할 말이 목 속으로 기어든다”며 유신독재 시대 공화당 의원이 된 것을 몇 대목에서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회고록이 ‘아주 사적인···’이란 형용구를 부친 것은 그가 언론인임을 실증시켜 준다. 그는 ‘언어의 힘, 말의 정치’라는 장(章)에서 꾸밈없이 자신의 정치의 뼈대가 언론인임을 드러내고 있다.·

1989년 6·29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민정당 대통령 후보일 때, 그는 정책위의장을 두 번째 지내고 있었다.

노 후보의 측근참모 역할을 하고 있던 김학준 박사(현 동아일보 사장· 민정당 전 의원·서울대 정치과 교수)가 연설 원고를 갖고 찾아 왔다. 김 박사는 그가 조선일보 정치부장일 때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신문 주필일 때는 비상임 논설위원이었다.

<노 후보의 연설문에는 “흔히들 일본말인 ‘야마(山)’가 없었다. 화끈한 주제라 할까. 알맹이가 없었다.”

그는 “위대한 평민의 시대라는 구절을 넣으면 어떻겠느냐”고 김 박사에게 물었다.

“역시 지적 수준이 보통이 아닌(익살적인 표현으로는 비보통) 김 박사는 달랐다. 잠깐 생각하더니 그것을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라고 ‘평민’을 ‘보통 사람’으로 바꾸었다. 나는 즉각 대찬성이라고 하였다.”>

이번 회고록의 끝에 ‘정직하고 교훈적인 현대 한국 정치사의 증언’이란 서평을 쓴 김 박사는 이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라는 말을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의 칼럼으로부터 빌려 썼다. 그는 1981년 4월 24일자에 ‘보통 사람들의 보통 이야기’라는 제목에 이어 1985년 1월 6일자에 ‘위대한 보통 사람’이란 칼럼을 썼다”며 발상의 첫머리는 언론계 선배인 남 국장의 ‘위대한 평민의 시대’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정치인이 된 언론인 남재희 전 한국일보 편집부 기자의 제목달기 솜씨는 그가 언론인임을 다시 보여준다. 그는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자 정권인수위원회 노릇을 한 민족화합추진위원회 제2분과위인 광주사태를 다루는 민정당측 위원이었다.

그는 ‘광주사태’가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기사 쓰듯 담담히 비망록에 적고 있다.

<“광주사태는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었고, 노 대통령으로서도 영어에서 빌려와 우리도 항용 쓰는 문구대로 ‘뜨거운 감자’였다. 나도 당시(80년) 그 문제로 고민하여 국방장관을 지낸 정래혁 의원과 수습책을 의논하기도 하였으며 또 첫째딸(남영숙, 외교통상부 FTA 담당 심의관, 고대 경제학과 80학번, 83년 집시법 위반으로 1개월간 수감)이 (광주)사건 1주년 때 ‘전두환 정권 규탄’ 전단을 대학교 캠퍼스에 살포하여 구속되기도 하는 등 마음 아픈 사건이다.”

이 ‘아픈 사건’에 대해 제목을 어떻게 다느냐를 놓고 제2분과위는 양시론으로 갈려 있었다. “나는 내가 신문사에 있었을 때부터 잘 알고 있었고 더구나 세종라이온스클럽이라는 친목·봉사 단체의 같은 멤버인 제2분과위 장덕진 위원을 민화위 근처 식당에서 만나 상의했다.

고심 끝에 ‘민주화 운동’이라고 했으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양시론이 아니라 광주시민의 편을 드는 표현이다. 그렇다고 광주시민을 영웅시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군부의 조치에 부정적임이 분명하다. 나는 내가 제의한 것으로 분명 기억 하는데 술도 하는 자리였으니 혹 그렇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장 씨가 말했을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내가 제안한 것이라고 고집스럽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세월이 흘러 15년이 지나고 20년이 가까워 오는 오늘날까지도 ‘광주사태’는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굳어졌다.”

언론인 남재희는 이 두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결론 내리고 있다. “말(언어)이 생각의 집이고, 상상력은 그 말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렵다고들 한다”

나는 이를 이렇게 풀어봤다. “언론(기사와 논설)은 기자의 생각의 집이고, 상상력은 그 언론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렵다.”

나는 남재희 기자, 편집국장, 주필, 전 국회의원은 ‘보통을 넘는 언론인’이라고 느꼈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