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 첫 여성의장 내정… "부시 失政 파헤칠 것" 목청

“미국은 변화를 선택했다. 우리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7일(현지 시각)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의 다수당으로 확정된 직후,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낸시 펠로시(66)는 이렇게 선언했다. 펠로시가 이끄는 민주당은 이날 하원 435석 중 과반(218)을 훌쩍 넘는 232석을 얻으며 ‘공화당 의회지배 체제’를 12년 만에 막을 내리게 했다.

이로써 펠로시는 미국 역사상 첫 여성 하원의장의 영예를 안았다. 하원의장은 대통령 부재할 때 부통령 다음으로 대통령직을 대행하는 ‘넘버 3’ 자리로, 여권 신장의 목소리가 높은 미국 내에서조차 이 같이 ‘여성’이 의회의 최고위직에 오른 것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펠로시의 감회 또한 남다르다. “나에게 주어진 이 기회가 여성도 권력의 최고위직을 무난히 수행할 수 있으며, 어떤 환경도 헤쳐 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여성 파워’에 대해 특히 강조했다. 47세에 보궐선거 하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지 19년 만에 의회 수장에 오른 소감이다.

내년 1월 하원의장에 오르게 될 펠로시가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임기가 2년 남은 부시 행정부를 견제하는 일과 12년간 공화당의 그늘에 가려 약해진 민주당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제를 풀기 위한 펠로시의 행보는 빨랐다. 펠로시는 하원의장으로 내정되자마자 CNN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견제와 균형, 행정부를 감독하는 것은 의회의 헌법상 책임”이라며 “이라크 전쟁 등 부시 행정부의 실정과 부정부패 사건에 대해 청문회를 열 수 있다”고 부시 행정부에 대해 강한 ‘제동’을 암시했다.

향후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게 됨에 따라 펼칠 정책 방향에 대해서도 소신을 뚜렷이 했다. ‘민주당 주도 하원의 첫 100시간 아젠다’ 발표를 통해 ▲9·11조사위원회 권고의 즉각적인 수용 ▲최저임금의 시간당 7.25달러(7,250원)로의 증액 ▲연방기금을 통한 줄기세포 연구 확대 ▲석유기업들의 감세 철폐 등이 펠로시가 내년 회기 시작 100시간 내에 입법화하겠다고 공언했다. “워싱턴의 고인 물을 즉각 빼내고 새로운 룰을 정립하겠다”는 포부이다.

1987년부터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 색채가 강한 캘리포니아 제 8선거구에서 11차례나 당선된 바 있는 펠로시는 그간 낙태와 동성 결혼을 옹호하고, 총기 소유에 반대하는 등 진보주의자로 명성을 쌓았다.

이에 대해 공화당은 ‘정신 나간 리버럴’, ‘명품 입은 골수 좌파’라고 비난해왔지만, 정치적 역량에 관해선 대체로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펠로시는 주요 이슈가 터질 때마다 당내 극심한 분열을 수습하고 단결을 이끌어내는 등 탁월한 리더십과 균형감각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특유의 친화력과 활동력으로 기금 모금 능력도 뛰어나다. 이번 중간선거를 위해 지난 4년 동안 무려 1억 달러를 모금해 후보들을 지원하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난 펠로시는 볼티모어 시장 및 5선 하원의원을 역임한 아버지와 역시 볼티모어 시장을 지낸 오빠를 둔 이탈리아계 정치 명가 출신. 하지만 결혼 후 다섯 아이의 어머니로 막내딸이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46세에 정치에 뛰어들 정도로 가정적인 면모를 지녀 미국인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펠로시는 또 여성 정치인의 새 모델로도 주목 받고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라는 ‘강한 남성’을 배경에 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는 달리, 남성의 후광 없이 워싱턴 최고직위에 오른 여성이기에 미국 정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