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그 나름대로 일정한 뜻을 담는다. 그러고는 어느 정도 그 의미대로 사용할 것을 사용자에게 요구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그 의미를 무시한 채 사용하는 예를 볼 수 있다. 어떤 인물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역임하다’가 그 한 예다. (괄호 안은 언론사 이름 또는 이니셜과 발간일임.)

(1) 1984∼90년 (니카라과의) 대통령을 역임한 오르테가는 옛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미국 지원 하의 콘트라 반군과 8년 동안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ㅅ, 11월 7일)

(2) 해양수산부 차관을 역임한 뒤 지난해 8월 취임한 김 사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ㅁ, 11월 7일)

(3) 지난주에는 중국 ‘빅4’ 가운데 하나인 건설은행장을 역임한 장언자오가 재직 기간 뇌물을 받은 혐의로 법원에서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ㅁ, 11월 7일)

(1)~(3)에서 쓰인 ‘역임(歷任)하다’의 ‘역’(본음은 력:歷)에는 ‘무엇을(어떤 일을) 거친다’는 뜻이 있다. 여러 대를 거치거나 대대로 이어 내려온 여러 대(代)가 ‘역대(歷代)’이고, 차례차례 방문하는 일이 ‘역방(歷訪)’이며 지금까지 지나온 경로가 ‘역정(歷程)’이다. 많은 전쟁을 치른 경험이 ‘역전(歷戰)’이며 이런 경험이 있는 이가 ‘역전의 용사’다. 학교를 다닌 경력이 ‘학력(學歷)’이고 여러 가지 일을 겪어 지내옴이 ‘경력(經歷)’이며, 이의 총합, 즉 지금까지 거쳐 온 학업·직업·경험 등의 내력이 ‘이력(履歷)’이다. 앞선 경력이 ‘전력(前歷)’이고, 여러 가지로 쌓은 경험이 ‘편력(遍歷)’이다. 의료계에서 흔히 쓰는 ‘병력(病歷)’도 지금까지 앓은 병의 종류나 그 원인, 병의 진행 결과, 치료 과정 등을 뜻한다. 위의 예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직위를 두루 거쳐 지내야 ‘역임(歷任)하다’를 쓸 수 있다. 따라서 위의 (1)~(3)처럼 어떤 직책명 하나만을 제시할 때에는 ‘역임하다’를 쓸 수 없고, 그 대신 ‘지내다’, ‘맡다’란 말을 써야 한다. 다음의 (4), (5), (6)은 ‘역임하다’의 의미를 충실하게 잘 살려 쓴 예다.

(4) (구논회 의원은)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충남대를 졸업하고 제약회사 영업사원, 학원 대리운영을 하기도 했으며 17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에는 열린우리당 원내 부대표, 국회 교육위원과 정치개혁 특위 위원 등을 역임했다. (동아일보, 11월 6일)

(5) 송 위원장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전남 부지사와 광주시 행정 부시장, 중앙인사위원회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한국일보, 11월 6일)

(6) 김 회장 대행은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1980년 수협에 들어온 뒤 유통기획부장과 경제사업 담당 이사 등을 역임했다. (한국경제, 11월 6일)

‘역임하다’는 (4)의 제약회사 영업사원, 학원 대리운영자, 열린우리당 원내 부대표, 국회 교육위원, 정치개혁 특위 위원, (5)의 전남 부지사, 광주시 행정 부시장, 중앙인사위원회 위원,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6)의 유통기획부장, 경제사업 담당 이사처럼 직책 이름을 둘 이상 제시할 때에 비로소 쓸 수 있다. 여러 직책을 성공적으로 ‘역임한’ 인사들의 모습에서는 연륜과 금도(襟度)가 느껴진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젠 단 하나의 직책명을 알리면서 ‘역임하다’로 쉽게 말하지 말자.


김희진 국립국어원 국어진흥부장 hijin@mct.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