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원 전 외무장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둘 다 '민족주의자'였기에 가능했다고 회고한다. 요즘 말하는 '자주외교'를 그는 '주체외교'라 썼다.

송민순 외교부 장관 내정자는 한나라당의 후보 지명 철회 요구에도 불구하고 장관에 임명될 것이 확실하다. 아쉬운 것은 지난 11월 16일에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송 내정자가 ‘자주외교주의자’로 지목되고도 이를 “그렇다”고 답변하지 않은 점이다.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은 “이전에는 자주외교를 비판하는 듯하다가 청와대에 들어간 뒤 자주과잉을 보인다”고 질의했다. 같은 당 이해봉 의원은 “가장 친미적인 외교관이 외교안보실장이 된 뒤 입신을 위해 유전자를 바꾼 것이냐”고 힐난했다.

송 내정자는 “직위와 자리를 위해 소신을 바꾼 적이 없다. 수용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송 내정자가 이때 “자주과잉이 무슨 말입니까. 제가 반미주의자라는 이야기입니까. 의원님들이 ‘자주외교’, ‘친미외교’를 알아보려면 이동원 전 외무장관이 쓴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1992년 발간)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거기에 대답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송 내정자도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을 것 같다. 또 읽어보았더라도 이동원 전 장관의 고견을 이제는 들을 수도 없게 됐다. 이 전 장관은 청문회 이틀 후인 18일 항년 80세로 세상을 떴다.

송 내정자보다 18세나 나이가 많은 이동원 전 장관은 ‘최초’,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많은 사람이다. 연세대 정외과 재학 중 우리나라 ‘제1호 해외유학생’, 1962년 최연소 청와대 비서실장, 1964~66년 최연소 외무부 장관, 국회 최초의 전국구 4선 의원. 그리고 영국 옥스퍼드대 정치학 박사 학위 소지자이다.

이런 그가 91년 3월~92년 2월까지 <주간매경>에 매주 구술한 ‘원로 교우기’를 책으로 낸 ‘대통령을 그리며’에는 ‘친미’, ‘반미’, ‘주체’, ‘자주’의 시쳇말이 어떻게 1960년대에 쓰였는가와 함께 당시 40대였던 그의 호기와 낭만이 깃들어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 박사 과정 수료 후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 회고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만남, 한·일 회담,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한·미 관계, 민정 이양을 앞둔(62~63년) 한·미 간의 갈등을 구수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의 시초를 “서로 간에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둘 다 ‘민족주의자’였기에 가능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지만 ‘민족주의자’라는 말은 책에서 자주 쓰고 있다. 요즈음 말하는 ‘자주외교’를 그는 ‘주체외교’라 쓰고 있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본다.

<외무장관이 되었을 때(64년 7월) 한·일 국교정상화가 물론 가장 큰 당면과제였지만 우선 난 ‘주체외교’란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모든 걸 풀어가고 싶었다. 마침 취임 후 얼마되지 않아 주체외교를 시험해 볼 기회가 찾아왔다.

1984년 8월경으로 기억된다. 가장 가까운 우방인 주한 미 대사가 바뀔 즈음 내 집무실에선 나와 윤호근(후에 뉴욕총영사로 81년 퇴임)의 전 국장이 말(言)로써 ‘주체외교’의 포문을 연다.

“윤 국장, 모레 버거 후임으로 브라운 대사가 부임하지요. 그런데 지금까진 외무장관이 공항에 마중나가는 게 관례라 들었소. 하나 난 가지 않을 작정이오. 이젠 우리도 독립국가로서 당당한 외교를 할 때요. 안 그렇소.”

“예, 동감입니다. 저도 그 점을 늘 굴욕적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관례라지만 잘못된 건 잘못된 겁니다. 어떻게 일개 국가의 대사가 부임하는데 외무장관이 마중나갑니까. 우리가 미국의 속국이라도 됩니까.”

“그러니 공항에 나 대신 윤 국장이 나가도록 하시오.”

“예, 이제야 우리도 체통이 서게 됐습니다. 장관님.”>

이 ‘주체외교’는 성공했다. 부임 이틀 뒤 외무장관 관저를 찾은 브라운 대사는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이 아시아에서 일본 대신 제국주의로 등장한다는 비난이 이는 속에 외무장관이 대사를 맞는 것은 서로의 이미지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공항에 국회의원들이 나왔던데 제가 거북해 혼이 났습니다.”

그러나 ‘주체외교’가 꼭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다.

<1966년 2월, 박 대통령이 말레이시아, 태국, 대만을 순방하고 귀국할 때 김포공항에서의 일이다.

윤호근 국장이 그날도 공항에서 대통령을 맞을 의전을 관리하고 있었다. 관례대로 그날도 미국 대사와 미 8군사령관은 삼부요인이 늘어선 상열 중 앞쪽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체외교’를 외치던 윤 국장이 브라운 대사, 비치 중장에 다가갔다.

“실례합니다만, 대사와 군사령관의 위치는 저쪽입니다.” 윤 국장의 손은 각국 대사들이 늘어서 있는 뒷줄을 가르키고 있었다. 브라운 대사는 물러섰지만 비치는 버텼다. “이것 보시오. 여긴 지금까지 항상 내가 서있던 자리오. 날 보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는 거요. 나는 못 가겠소.”

윤 국장은 버티는 비치를 몸으로 뒷줄로 밀어냈다.

윤 국장은 이 사건으로 스웨덴 참사관으로 좌천됐다. 그는 2005년에 쓴 그의 회고록 ‘한(恨)반도’에서 ‘주체외교’를 ‘자주외교’라 바꿨다. 이동원 전 장관만 ‘주체’라고 했지 다른 사람들은 ‘자주’라 했다고 적었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