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춰야 했다. 때 자국이 흐르는 얼굴과 굉장히 지저분한 머리와 수염, 그리고 한 달 동안 빨지 않은 듯한 옷까지···.”

신문편집 실습 과제로 노숙자 취재를 하게 됐다는 한 학생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노숙인 = 지저분하고, 술에 찌들어 있으며, 폭력적인 사람’ 등의 공식이 우리의 머리 속에 각인돼 버렸다. 물론 노숙인 가운데는 지하철역사 등에서 자면서, 술에 의지해 세상에 한풀이를 하는 이들도 간혹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전체의 10%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외환위기 이후 줄곧 노숙인 지원 업무를 해온 사회복지 전문가의 말이다. 비록 쉼터나 상담센터, 쪽방과 고시원 등에서 안정되지 않은 주거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근로를 통해 소득을 얻고 다시 재기할 날을 꿈꾸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노숙인에 대한 뿌리깊은 ‘부정적 낙인’은 이들의 재기를 더 어렵게 한다. 힘들게 직장에 들어가도 과거 노숙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결국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시 일어서기를 간절히 원하는 노숙인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인색한 것도 문제다. 노숙인 문제는 외환위기 이후 한때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우리 사회에서 노숙인이 점점 줄어가는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노숙인 현황부터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시설의 부족은 물론, 관련 종사자의 처우까지 모든 것이 열악하다. 사회복지 사업에서도 가장 소외 받고 있는 분야가 바로 노숙인 분야라는 지적도 있다.

자칫 ‘게으르고, 무기력한 사람들’이라는 낙인은 노숙인 지원사업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오인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 그러나 노숙인들은 거리로 내몰리기 전에도 불우한 가정 환경, 낮은 기술 등 취약한 여건 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온 이들이 상당수이다. 수많은 실패와 냉대로 지치고, 희망을 잃은 이들이 건강하게 지역사회로 복귀하도록 지원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우리 사회가 ‘마음의 가난’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 주변부를 되돌아보는 따스한 관심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때마침 12월 18일 대학로 아리랑 소극장에서 노숙인 극단 ‘징검다리’가 공연을 갖는다. 찾아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아픔을 나누고 희망을 합창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