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견습기자 11기(1960년 3월 입사) 출신인 강범석 일본 히로시마 시립대 명예교수가 그렇게 나이가 많은 줄 몰랐다(1934년생). 필자가 견습 17기(1964년 12월 입사)로 한국일보 사회부에 근무할 때 키 162cm, 몸무게 58kg의 강 기자는 정치부 중앙청 출입기자로 매주 화요일 아침에 열리는 사원회의에서 특종기자로 자주 뽑혀 상을 받았다.

마이크를 잡은 당시 발행인 김종규 사장(전 이란대사, 서울신문 사장 역임)은 강 기자 이름이 빠지면 "어, 이번주에는 왜 강범석 기자가 빠졌지"했다.

그런 강 기자는 1983년 주일대사관 공사(공보문화원장)를 지낸 후 91년 오사카 시립대 대학원에서 정치사 박사학위를 딴 후 일본 대학의 교수가 됐다. 그는 지난 11월20일 ‘잃어버린 혁명-갑신정변 연구'를 냈다.

한반도 근대 이행기 때인 1884년 12월 4일 일어난 갑신정변을 특종기사를 쓰듯 깨알 같이 추적한 411쪽짜리 책이다.

강범석 교수는 조선일보 문화부 유석재 기자에게 "지금까지 김옥균 등 개화파 세력이 일본에 지나치게 의지했다는 시각은 일본인이 만든 자료에 바탕을 둔 것이 된다. 국제정세를 읽고 일본의 힘을 이용한 개화파 세력의 '주체적인 성격'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화파 세력, 그 주모자 김옥균(1851-94)은 과연 주체적이었을까. 그 해답은 왜 발발 120년이 지난 후에 낸 책의 제목을 '잃어버린 혁명'이라고 했을까를 추적하면 가능해진다.

고종 시대 궁정 속의 왕의 하루 행적을 적은 일성록(日省錄)은 '12월 4일 일어난 변(變)을 한자 49자로 기록했다. <밤에 경우궁으로 옮기다. 각전궁(各殿宮, 왕비·세자의 궁)도 함께 옮기다. 5적(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군부(君父)를 공동(恐動, 위험한 말로 사람의 마음을 두렵게 함)하고 교(典敎)를 고쳐 왜병을 불러들여 금정(禁廷, 대궐안 출입금지)을 유린하고 재보(宰輔, 재상)을 장해(戕害, 죽임, 살해)하다.”

"김옥균 등은 극한 상황에서 변혁을 위해 궐기했다. 그들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갑신정변은 '잃어버린 혁명'이라 해야 할 것이다"

3일간의 정변을 49자로 기록한 이후의 긴 공백. 강 교수는 이를 끈질기게 추적해 갑신정변은 ‘잃어버린 혁명’이라고 결론지었다. 김옥균 등이 추구했던 ‘혁명’은 일본의 ‘음모’와는 다른 주체적인 것이며, 독립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일본당이라고 불렀지만 개화파, 독립당은 추구하던 개혁, 혁명을 잃었기에 잃어버린 혁명’이 된 것이다.

김옥균은 임오군란 때 물러났던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가 다시 부임해 고종을 1884년 10월 20일 면대한 후 일본에서 만나 말했다.

“나는 물론 일본당이지만 일본은 싫다”며 ‘부득불의 선택’임을 강조했다. 김옥균이 죽은 후 나온 ‘김옥균 상전(詳傳)’에는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주체적’인 것으로 써 있다.

“일본은 청을 대신하여 아시아의 맹주가 되겠다는 비수와 같이 번득이는 정략(政略)을 품고 있었으므로 일본에의 ‘의뢰’(의지와 당부의 뜻)는 쌍날의 칼 위에 올라선 것과 같았다”고 피력했다.

1910년 한·일 합방이 이루어진 후에 일본 국회에서는 김옥균을 도왔던 이들이 ‘김옥균 표창’ 운동을 벌였다.

이때 자택의 거실을 ‘김옥균 거실’이라 만들고 1만4,000점의 김옥균에 관한 문헌 액자를 가진 수나가 하지메(1868-1943)는 반대에 나섰다.

“사람이 죽기는 어렵지 않아도 죽을 자리를 택하기는 어렵다. 거사(居士, 김옥균)와 같은 이는 참으로 죽을 자리를 얻었다 할 수 있고 흠앙해 마지 않는다. (…) 고국의 멸망을 목도하지 않아도 됐던 것은 하늘이 내린 행운이다. (…) 요즘 증위(贈位, 작위를 주는 것) 움직임이 있다고 들린다. 조선의 오늘 모습은 거사가 뜻한 바가 아니다. 거사의 눈으로 보면 아국은 적국이다. 적국의 증위가 무엇이 기쁘겠는가. 거사는 구천(九天) 아래에서 실소하고 있으리라. 거사의 증위를 기뻐한다면 명절(名節, 명예와 절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다른 매국노들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말해 무엇하랴.”

수나가는 김옥균의 문적, 원고를 보관하고 있는 사노시(市)에 사는 게이오의숙 출신 방직업자였다. 많은 조선인 유학생과 망명 정객을 도왔다.

1909년 ‘대한제국의 멸망’을 쓴 호머 헐버트(1863-1949, 당시 고종 자문관)는 개화파와 김옥균에 대해 평했다. <“그들은 진정한 애국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고, 같은 시대의 사람들을 훨씬 앞서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국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 시대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해서, 끝내 마다하려 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돌아갈 영예(honor)는 결코 감소할 수 없다”고 찬사를 했다.>

강 교수는 결론 내렸다. “김옥균과 그의 당여(党與, 한편이 되는 도당)는 당시의 극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내외 조건 아래에서 현상 변혁을 위해 궐기했다. 그들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120년 전 로우웰이 말한 의심스런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앞으로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있는 한 1884년의 갑신정변은 ‘잃어버린 혁명’이라 해야 할 것이다.”

엉뚱한 권고을 해본다.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은 강범석 교수를, 강범석 전 한국일보기자 선배 를 만나 교과서포럼의 일부 교수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근대로의 주체적 이행 과정’이라 서술한 것이 옳은지 자문해 보기 바란다.

*퍼시번 로우웰은 1883년 첫 방미사찰단에 동행한 외국인 고문으로 갑신정변에 대해 “김옥균 등이 일본측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언제나 의심스런 ‘미해결문제’로 남게 될 것이다”고 1886년 애틀란틱지에 기고했다.


언론인 박용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