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군인이다. 두려움은 없다. 나는 지하드(聖戰)에 평생을 바쳤다. 이 길을 가는 어떤 사람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2006년 12월 30일 새벽 6시30분께. 목에 검은 스카프를 걸치고 오랏줄을 맨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대답했다. 무와파크 알 루바이에 이라크 국가안보보좌관이 “후회나 두려움이 없느냐”는 물음에 대해서였다.

2005년 1월 미국 국무부 장관직을 사임한 콜린 파월은 직원들에게 이임사를 했다. “이제 장관직을 그만두면 40여 년간의 공직을 떠나는 것이다. 군인으로 나는 미 육군에 35년간 복무했다. 누가 뭐래도 앞으로도 나는 군인이 아닐 수 없다.”

사담 후세인은 1937년 4월 28일, 콜린 파월은 4월 5일생. 둘 다 소띠에 올해 70세다.

이번 교수형을 보면서 후세인의 ‘군인’과 파월의 ‘군인’은 그 의미에서 대양보다 넓은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후세인은 군에 입대했거나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그는 59년 11월 왕정을 쿠테타로 쫓아낸 카심 중장을 총으로 암살하려고 한 바트당의 ‘혁명분자’요 ‘전사’였다. 그는 80년 이란과 전쟁을 하면서 스스로 원수(元帥)라고 칭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각료들은 녹색 올리브 군복을 입게 했다. 그는 무엇보다 군인들의 힘찬 발걸음에 너무나 감격해 했다.

파월은 58년 7월 10일 뉴욕시립대 ROTC 후보생에서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그때를 회고했다. “그날은 군인 선서를 해서 감격적인 날이 아니었다. ‘모든 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미국, 대통령의 명령을 이행한다’는 선서를 해서도 아니다. 재단사가 만든 군복을 처음으로 입어보는 스릴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감격스러웠다.”>

이렇게 ‘군복’에 대한 두 사람의 다른 느낌은 40여 년간에 큰 차이를 두며 자랐다.

88년 8월 후세인이 이란과 정전협정을 맺었을 때 파월은 레이건의 안보보좌관이었다. 파월은 후세인을 인질과 석유문제로 각을 세운 이란에 대해 미국을 대신해 상대해주는 ‘좋은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세인의 이라크를 <공포의 공화국>이라고 간주한 책을 낸 이라크 망명 건축가 카난 마키야는 군인으로서의 후세인을 낮게 평가했다.

“이란과의 전쟁에서 이라크 군대의 활약은 효과적이지 못했다. 군대는 훈련이 부족했고 특히 후세인의 꿈 같은 작전 명령은 문제였다. 그는 작전이 실패했다는 비판이 일자, 지휘관들이 겁쟁이고 무능하며 배신자라서 그랬다며 처형했다.”

“그는 꿈을 꾸는 엉터리 전략가였지만 적을 선택하는 형안을 가지고 있었다. 사우디 다음의 석유매장량을 가진 이란을 적으로 삼아 미국 등에서 무기, 자금 등 지원을 받은 것이다.”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는 투옥, 고문, 병신 만들기, 사형집행이 자주 일어났다. 82년에는 보건부 장관 리야드 이브라힘 후세인이 각료회의 중 ‘이란과의 정전’을 요구했다. 후세인은 그에게 면담하자며 옆방으로 데려갔다. 후세인은 혼자 회의에 돌아왔다. 그는 그 후 인터뷰에서 보건부 장관의 살해를 부인했다. 그러나 이브라힘의 부인은 총살을 당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다.

소련의 요셉 스탈린을 가장 존경한 후세인은 특히 스탈린의 비밀경찰 조직을 선망하는 전체주의 독재자가 되어갔다. 그는 각료들이 너무 살이 쪘다면서 다이어트한 후의 체중을 신문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시골에서 문자 해득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3년 징역형을 내렸다. 제1차 걸프전쟁(91년)에 패배하고도 그는 승리했다고 강변했다. 유엔의 통제 속에서도 그는 100억 달러의 자금으로 무기 현대화에 나섰다.

파월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제1기 정부에서 국무부 장관이 됐다. 그는 의회 청문회에서 후세인에 대해 평했다. “비록 후세인이 그들의 국군의 날 펴레이드에 중절모에 장총을 쏘아대며 군사력을 과시했지만 내 생각에 이라크는 분열되고 찢어진 약한 나라다.”

“그러나 미국이 생화학 및 대량살상 무기를 감시하고 유엔을 통해 무기자금 출입 상태를 감시하지 않는 한 이라크는 위험국가다.”

파월이 부시 대통령의 제2기 정부에서 왜 사임했는가의 이면을 상세히 캔 워싱턴포스트의 캐런 드영 편집국장보(2002년 퓰리처상 9·11 보도 부문 수상자)는 지난해 10월에 낸 <군인: 콜린 파월의 일생> 평전에서 그 내막을 밝혔다. 이 책에는 후세인에 대한 파월의 깊은 통찰이 있다. 파월은 후세인을 그가 생각하는 ‘군인’으로 보지 않았다. 파월에게 후세인은 ‘군인’도 ‘전사’도 아니었다.

그는 ‘장관’이기보다 ‘장군’이라 불러주길 바랐다. 그는 이라크를 찢어진 나라로 봤고 이를 지배한 후세인은 이상을 저버린 편협한 독재자로 봤다. 파월은 국제협력를 통해 이라크를 봉쇄하면 이 찢어진 나라를 민주국가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명을 따르는 ‘군인’인 그는 부시의 이라크 침공 결정에 찬성해야 했다.

후세인의 처형에 대한 콜린 파월의 코멘트가 기다려진다.


박용배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