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불출마 전격 선언… 정치판 요동

연기 연습으로 1년 넘게 땀을 뻘뻘 흘리던 주연급 배우가 돌연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것도 아예 은퇴를 하겠단다. 아직 본무대의 막도 오르지 않았는 데도 말이다. 늦게 배우는 연기가 너무 힘들고, 관객이 다른 주연급 배우들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어 자신이 무대에 오르더라도 큰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함께 개막을 준비하던 배우들도, 흥행을 기대하던 관객들도 허탈하다. 그 배우 팬들은 “이건 실제 상황이 아니야, 또 다른 연극이야” 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당혹스럽다.

그런데 이런 시나리오가 실제로 일어났다.

“지난 1년 가까이 상생의 정치를 찾아 진력해 왔지만 대결적 정치구조 앞에서 저의 역량이 부족함을 통감한다. 제 활동의 성과가 당초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여론의 평가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 기존 정당의 벽이 높아 현실 정치의 한계를 느낀다.”

합리적 중도세력의 대결집의 기치를 내걸고 화려하게 대통령선거전 무대에 나섰던 고건(70) 전 국무총리가 지난 16일 불출마와 정치활동 중단을 전격 선언했다. 올해 12월에 실시되는 대선의 유력한 주자 ‘빅3’ 중 1명이 레이스 도중에 하차한 것이다.

고 전 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대선 불출마를 선언할 예정이었으나 지자자들이 기자회견장에 몰려와 회견을 방해함에 따라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결정하며’라는 자신의 심경을 담은 성명서를 남기고 홀연히 정치판을 떠났다.

그의 불출마 배경으로 ▲지지율 하락 ▲정치권의 높은 진입 장벽에 대한 환멸 ▲통합신당 작업의 지지부진 ▲노무현 대통령과 충돌 ▲건강 문제와 가족의 반대 등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지만 이런 모든 요소가 중층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하기사 정치인이 되려면 이전투구에 능해야 하고, 거짓말도 뻔뻔하게 할 줄 아는 철면피여야 하고, 남의 뒤통수를 치는 권모술수의 명수여야 하는데 평생을 공직생활에 몸담아온 7순의 ‘행정의 달인’이 감당하기에는 냉혹한 현실이 벅찼을지 모른다.

어쨌던 고 전 총리의 불출마 선언으로 기존의 대선구도는 뿌리째 흔들리게 됐다. 당장 여권은 유력 주자 중 한 명이 사라짐에 따라 대안을 찾기 위해 부심하고 있고 통합신당 작업도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 벌써부터 한나라당의 대선 주자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열린우리당 내 일각에서는 지지율이 낮은 기존의 여권 대선 주자들을 모두 사퇴시키고 대신에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등 신선한 인물을 외부에서 영입하자는 목소리가 다시 나오고 있다.

여야 대선 주자 진영은 고 전 총리의 불출마로 인해 누가 더 반사이익을 얻을 것인가를 놓고 주판알을 퉁기기에 바쁘다. 일단은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호남표를 흡수하게 돼 유리할 것으로 점쳐지지만 여론조사에서는 의외로 고 전 총리의 중도보수 성향의 표가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쪽으로 더 많이 이동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치판을 뒤흔든 고 전 총리는 불출마 선언 후 곧바로 호남으로 내려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국민들은 2004년 노 대통령 탄핵안 사태 때 보여준 고 전 총리의 위기관리 능력을 높이 평가해 왔는데 그가 올해 대선을 통해 큰 꿈을 펴지 못하고 너무 일찍 포기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국가 원로로서 고 전 총리가 계속해서 우리 사회에 바른 목소리를 내주기를 원하고 있다. 정치 무대에서 떠났어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기에는 고 전 총리의 경륜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