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ISO가 이제는 연륜에 걸맞게 기업들의 경영관행, 나아가 인간사회 규범의 표준을 개발하는 쪽으로 사명을 재정립하고 있다. 이른바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을 국제표준으로 강제하려는 야심찬 기획이다. ISO26000 제정 작업은 그런 시도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다.
ISO의 이런 노력은 시대적 요구를 적절히 반영한 것이다. 지구촌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도 표준 제정 작업에 동참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표준의 속성이다. 표준이라는 것은 정의나 도덕과 달리 선험적으로 바른 것, 옳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 먼저 나서서 ‘이게 옳다’라고 선언하면 그 순간부터 표준이 되는 것이다. 이후의 역학관계는 뻔하다. 표준을 만든 쪽은 주도권을 잡게 되고 나머지는 싫어도 끌려갈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ISO26000 제정 관련 총회에서는 일본의 행보가 두드러졌다. 일본을 대표하는 20여 개 글로벌 기업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회적 책임 보고서’ 전시회를 단독 개최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프랑스, 스웨덴 등 몇몇 유럽 국가들도 이에 질세라 부산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이에 비해 우리 기업들의 준비 태세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했던 한 인사는 “우리는 정부 돈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기업들은 가장 큰 이해관계 당사자들인 데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고 있다”며 혀를 찼다.
실제 ‘사회적 책임 라운드’가 예고된 2005년부터 재계의 대응은 이렇다 할 만한 게 없다. 전경련은 ISO26000 제정 과정에 의견을 낸 적도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지는 형편이다.
지금 세상은 표준 전쟁 시대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표준에 맞지 않으면 팔 수도 없다. 표준을 잡아야 세상을 얻을 수 있다. 우리 기업들은 말로만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칠 게 아니라 행동으로 동참해야 할 때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