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표준화기구(ISO)가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그동안 ISO는 제품, 서비스, 절차, 재료, 시스템의 표준화를 추진하며 ‘지구촌의 기준’을 만드는 일을 전통적 역할로 삼아 왔다.

그러던 ISO가 이제는 연륜에 걸맞게 기업들의 경영관행, 나아가 인간사회 규범의 표준을 개발하는 쪽으로 사명을 재정립하고 있다. 이른바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을 국제표준으로 강제하려는 야심찬 기획이다. ISO26000 제정 작업은 그런 시도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다.

ISO의 이런 노력은 시대적 요구를 적절히 반영한 것이다. 지구촌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도 표준 제정 작업에 동참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표준의 속성이다. 표준이라는 것은 정의나 도덕과 달리 선험적으로 바른 것, 옳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 먼저 나서서 ‘이게 옳다’라고 선언하면 그 순간부터 표준이 되는 것이다. 이후의 역학관계는 뻔하다. 표준을 만든 쪽은 주도권을 잡게 되고 나머지는 싫어도 끌려갈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ISO26000 제정 관련 총회에서는 일본의 행보가 두드러졌다. 일본을 대표하는 20여 개 글로벌 기업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회적 책임 보고서’ 전시회를 단독 개최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프랑스, 스웨덴 등 몇몇 유럽 국가들도 이에 질세라 부산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이에 비해 우리 기업들의 준비 태세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했던 한 인사는 “우리는 정부 돈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기업들은 가장 큰 이해관계 당사자들인 데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고 있다”며 혀를 찼다.

실제 ‘사회적 책임 라운드’가 예고된 2005년부터 재계의 대응은 이렇다 할 만한 게 없다. 전경련은 ISO26000 제정 과정에 의견을 낸 적도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지는 형편이다.

지금 세상은 표준 전쟁 시대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표준에 맞지 않으면 팔 수도 없다. 표준을 잡아야 세상을 얻을 수 있다. 우리 기업들은 말로만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칠 게 아니라 행동으로 동참해야 할 때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