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희라는 여섯 살 난 유치원생이 화자(話者)가 된 ‘사랑손님과 어머니’. 이 작품에서 사랑손님과 어머니가 옥희를 어떻게 불렀는지 살펴보자. 이 호칭이 작품의 흐름과 정서 상황과 적잖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표현과 표기는 1935년 발표 당시의 원문에 따르고 용례는 내용 전개 순서에 따른다.

사랑손님은 주인집 딸에게 한결같이 ‘옥희’라고 부른다. 아무리 상대가 어리더라도 ‘너’라고 하는 것보다 이름을 불러 주는 쪽이 상대를 더 대우한다는 점을 사랑손님이 취한 것으로 보인다.

(1) “옥희는 어떤 반찬을 제일 좋아하누?”

(2) “옥희 눈이 아버지를 닮았다. 고 고운 코는 아마 어머니를 닮았지, 고 입하고! 응, 그러냐, 안 그러냐? 어머니도 옥희처럼 곱지, 응?”

(3) “옥희, 이것 가져, 응. 옥희는 아저씨 가구 나문 아저씨 이내 잊어버리구 말겠지!”

어머니는 딸 옥희에게 ‘너’라고 한다. ‘너’가 듣는 이가 친구나 아랫사람일 때 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4) “그 풍금은 너의 아버지가 날 사다 주신 거란다.”

(5) “옥희야, 너 이 꽃 얘기 아무보구두 하지 마라, 응?”

(6) “옥희야, 너 아빠가 보고 싶니?”

그런데 어머니가 딸에게 ‘너’라고만 한 건 아니다. 때로는 이름도 사용한다.

(7) “옥희야, 옥희 아버지는 옥희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돌아가셨단다. 옥희두 아빠가 없는 건 아니지. 그저 일찍 돌아가셨지. 옥희가 이제 아버지를 새로 또 가지면 세상이 욕을 한단다.”

(8) “옥희는 언제나, 언제나 엄마하구 같이 살지. 옥희는 엄마가 늙어서 꼬부랑 할미가 되어두, 그래두 옥희는 엄마하구 같이 살지.”

(7)에서는 자신이 재혼하면 딸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칠 건지를 차근차근 꼽는다. 그동안 곰곰 생각해 왔던 바의 결론이다. 이어 (8)에서는 평생 딸을 의지하고 살 수밖에 없음을 일러 주며 사랑손님에 대한 미련을 끊으려 안간힘을 쓴다. 이때 딸에게 ‘너’란 말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고스란히 바칠 만큼 소중한 존재인 딸을 ‘너’라는 말로 대용(代用)하지 않고 이름으로 직접 꼬박꼬박 부른 것이다.

한편, 어머니가 삶의 유일한 목표가 딸에게 걸려 있음을 선언하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흔들리는 자신을 향한 다짐이기도 하다. 이때 ‘너’와 ‘옥희’가 섞이기도 한다.

(9) “옥희야. 엄마는 옥희 하나문 그뿐이다. 옥희 하나만 바라구 산다. 난 너 하나문 그뿐이야. ”

(10) “옥희야, 난 너 하나문 그뿐이다.”

(11) “엄마는 옥희 하나문 그뿐이야, 응, 그렇지…….”

(12) “응, 그래, 옥희 엄마는 옥희 하나문 그뿐이야. 옥희 하나문 그만이야. 그렇지, 옥희야.”

(9)~(12)는 ‘옥희.너’ → ‘너’→ ‘옥희’→ ‘옥희’순으로 이어진다. (10)의 ‘너’만 보일 때에는 자식 외에는 곁눈질하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결연한 의지도 드러난다. (11), (12)처럼 ‘옥희’라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꼭꼭 짚어 말할 때에는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삶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자신을 단단히 경계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특히 (12)에서는 ‘옥희’가 네 번이나 나온다.

결국 어머니는 사랑손님을 다른 데로 떠나보내면서 억지로라도 평상심을 되찾는다. 샘솟는 격정을 억누르며 ‘새로운 길’을 포기한 끝에 얻은 평상심이다.

(13) “옥희야, 너 이것 갖다 아저씨 드리고, 가시다가 찻간에서 잡수시랜다구, 응.”

딸을 부르는 말도 ‘너’로 자연스럽게 되돌아온다. 딸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 가며 갈등에서 벗어나려 애쓸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72년 전 주요섭 작가는 사랑손님과 스물네 살 청상(靑孀) 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김희진 국립국어원 국어진흥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