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

○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경주 최 부자(崔富者) 집의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의 일부다. 가훈 한 대목 한 대목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묻어난다. 그러기에 흉년에는 남의 논을 사지 않고 파장(罷場)에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

제값을 받지 못하고 파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웃이 굶주리지 않도록 언제라도 마음 놓고 퍼 갈 수 있도록 쌀뒤주를 따로 마련한다. 처지가 어려운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걸인에게도 정성껏 밥상을 차려 대접하는 것이 그 한 예다. 최 부자 집뿐만 아니라 명망 있는 집안에서는 대체로 자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왔다.

원칙이 옳다고 판단되면 혈연, 학연, 지연을 따지지 않는다. 청렴, 강직, 적선(積善)을 자손에게 가르친다. 신념이나 의리를 저버리면서까지 관직에 나가려 하지 않는다. 나라를 구하는 일에 목숨과 재물을 아끼지 않는다.

나라가 수치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책임을 느끼고 서슴지 않고 자결한다. 의롭게 죽은 분의 유가족을 돌본다. 소위 전통 있는 명문가의 인물들이 보여 주었던 전형적인 모습이 이런 것이었다.

지성, 체력, 기술력, 경제력이 다른 종족보다 뒤졌던 로마인이 대국을 건설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지도층의 책임감’이었다. 귀족과 원로원 의원들이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고 병역의 의무를 다하였다. 이와 궤를 같이하는 예들을 현대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영국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에서 50세 이하 귀족 남자의 20%가 전사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튼스쿨의 한 학급 출신 전원이 전사했다. 포클랜드 전쟁에선 왕자가 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최근엔 영국 왕위계승 서열 3위인 해리 왕자가 이라크 전선에 배치될 것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미국의 경우 비영리 단체에 기부한 돈의 80% 정도가 개인의 기부금이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이 자신의 재산 중 60%를 에이즈 퇴치 사업에 쓰고 투자 전문가 워렌 버핏이 재산 85%를 사회에 기부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최근엔 미디어 재벌 존 클루즈가 모교인 컬럼비아대학에 4억 달러 상당의 부동산을 기부한다고 밝혔다.

특권을 누리는 계층이 나라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든지 사회에 재산을 환원한다든지 하는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것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을 흔히 쓴다. 이 말은 본디 ‘귀족은 귀족다워야 한다’는 프랑스어 표현 ‘Noblesse Oblige’에서 비롯된 것이다.

발전하는 사회에는 그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지도 계층이 있다. 요즈음 한국 사회에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이’가 드물다고 한다.

부자(富者)는 많으나 존경받는 명망가가 드물고,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읽어내고 소명을 찾아내도록 제시해 주는 진정한 정신적인 지도층 집단이 드물다는 것이다. 그래도 혈연 아닌 이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준 기업인 유일한(柳一韓) 회장, 장애 있는 고아를 입양하는 분들에게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의 한 자락을 본다.

흔히 대장부의 조건으로 절제하기, 욕심 없애기, 법도에 맞게 덕을 실천하기를 꼽는다. 여기서 말하는 ‘대장부’란 남녀의 성(性)을 초월한다. 일면 ‘사회 지도층’과 직결되기도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새 시대를 열어 갈 자품과 능력을 갖춘, 존경받는 사회 지도층을 두텁게 쌓는 일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과제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