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종손 한태구(韓台九) 씨… 선대 묘소만 30기 이상 관리 생활 속에서 온고지신 실천문정공 한계희의 19대 불천위 봉사손… 종부는 봉제사 헌신

인조의 왕비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친정 아버지는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이다. 그의 백형에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이 있다. 관계로 따지면 구암은 인조의 처백부다.

택당 이식이 ‘유림에서 쌍벽이라고 불렀다(儒林連白璧)’고 표현한 것만으로도 당시 이들 두 형제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구암은 문과 출신이 아니며 또 벼슬도 그렇게 혁혁한 편은 못 된다. 그럼에도 역사 인물로 구암을 손꼽는 것은 그가 이수광, 김육, 유형원, 이익 등과 함께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구암은 학자로서 이름이 났다.

그가 문과 출신이 아니면서도 여러 고을의 수령과 호조참의 직에 이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쌓았던 학문과 인품 덕이 크다.

그는 고양팔현(高陽八賢)의 한 사람인 민순(閔純)의 제자이며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로, 대곡(大谷) 성운(成運),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과 함께 당시의 명유(名儒)로 추앙받았다. 민순 문하에는 모당 홍이상 같은 이가 배출되었다.

구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그의 묘소 입구 도로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의 조형미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신도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의 머리 모습은 특이하게도 뒤를 돌아보는 형상이다. 이수 부분은 여의주를 입에 문 쌍용 문양으로 매우 정교하다.

한백겸의 14대 종손 한태구(韓台九, 1959년생) 씨를 서울시 양천구 목1동 직장에서 만났다.

종손이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은 온통 영문서적들로 즐비했다. 받은 명함을 보니 저널, 온라인 콘텐츠, 외서 담당 부장이라는 직함에 한글로 이름이 적혀 있다.

'E * PUBLIC'이라는 회사명이 생소하다고 했더니, 원래 유명한 출판사였는데 창립50주년을 맞아 이름을 바꾼 것이라 한다. 종손의 첫인상은 성공한 직장인이며, 외국어에 능통한 이로 보였다.

만나자마자 자신은 역사를 잘 모른다고 겸양한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 점점 종손의 유가 교양을 드러내면서 그 반듯한 주견에 상대방이 빨려들게 만든다. 점입가경이라고나 할까.

종손은 서울 종암초등, 대광중, 용문고, 아주대학교 불문학과를 나와 다른 직장에 다니다 범문사로 옮겨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종손은 인터뷰 도중 불확실한 내용은 노모에게 전화로 물어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선친 한만갑(韓萬甲, 1924년생) 씨는 세브란스의대를 나온 인재였지만 신양(身恙)이 있어 사회생활을 온전하게 하지 못했다. 모친은 춘천사범학교를 나와 교편을 잡은 재원으로 이북 출신이다.

종손의 조부 율계(栗溪) 한기준(韓基駿, 1904년생) 씨는 경성제대 철학부를 나왔고 풍문여고 교장을 역임했다. 강원도 원성군에서 3차례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봉사(奉祀)하고 있는 대수를 물었을 때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족보 한 권을 꺼냈다. 사무실에 족보를 비치하고 있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제가 모시고 있는 선대 묘소가 30기가 넘는데 시사 때마다 유사 분들께 공평하게 나눌 때 참고하기 위해 이렇게 (족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 알 수가 없으니까요.” 종손의 무거운 책무를 재삼 절감하는 대목이다.

종손의 선대 묘소는 경기도 마석, 강원도 횡성, 경기도 여주 등지에 산재해 있었다. 이를 경기도 여주의 강천면 부평리 가마섬으로 모두 모셔 가족묘원으로 조성했는데, 그때 뜻하지 않은 일화를 알게 됐다고 한다.

가마섬을 ‘가마도(佳麻島)’로 표기한 유래였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곳이 왕릉이 들어설 정도의 명당이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섬 도자를 넣어 피했다는 것이다. 왕릉을 섬에 쓸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제가 직접 이장을 했습니다. 귀래라는 곳에 저희 선대 어른 두 분이 계시는데, 한 분은 정확하게 잘 모셔왔는데, 한 분은 경주 김씨를 잘못 모셔왔어요.

그 문중에서 난리가 났어요, 보상도 해주고 잘 수습한 뒤 그 위쪽으로 가보니 터가 더 좋은 곳에 저희 선대 조상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터도 좋고 또 이런 착오가 우연도 아닌 것 같아서 그곳만 이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한 곳으로 모시지 않은 어른입니다.”

묘소를 옮기는 것을 이장 또는 면례(緬禮)라 한다. 소정의 절차가 따르며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이러한 일을 한두 기도 아니고 30여 기의 선대 묘소를 한 곳으로 모셨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종손은 구암파 종중이 활성화되지 못한 것에 줄곧 아쉬워했다. 이유도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종중 정관을 꼼꼼히 읽었는데, 그것이 종중 구성원의 권리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현재의 종중 정관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채 종손이 잘못할 것에 대비한 종중인들의 권리 보호 차원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종손은 이 대목에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자세가 필요함을 힘주어 지적했다.

현재 청주 한씨는 전자족보를 만들고 있다. “저는 수동적으로만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예를 들면, 시제 날을 바꾸자고 갑작스럽게 논의할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상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저는 당시 이날을 제정해 오랫동안 따라온 조상의 정신을 숙고해보자는 했죠. 그런 후 이유가 타당하다면 3, 4년 뒤에 가서 바꿔도 탈될 게 없다고요.

그런데 요즈음은 당장 바꿀 생각을 하니 문제입니다. 족보도 그래요. 전자족보를 만들어 편리함을 도모한다고는 하지만, 그 편리한 만큼 변조나 왜곡 역시 용이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자칫 사심이 발동하면 계통을 뒤바꿀 수도 있겠죠. 편리한 만큼 위험한 요소도 있습니다.” 심사원려(深思遠慮)다.

구암 이후 14대를 내려온 계통을 보면, 7대에 걸친 양자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종손의 6대조를 시작으로 연 4대를 이은 양자가 있었다. 참으로 고단한 종가의 대 이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절되지 않고 종통을 면면히 계승해온 구암파 중중인들의 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대화 말미에, 종손은 자신이 19대 봉사손이며 그 대상이 문정공(文靖公) 한계희(韓繼禧, 1423-1482)라는 사실을 덧붙였다. 한계희는 예종의 스승이며 공신에 책록되었고 이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른 조선 초기의 저명한 정치가요 학자다.

현재 경기도 분당 율동공원 쪽에 묘소가 있다. 족보를 보니 문정공 아들 형제 중 둘째집으로 내려오다가 증손자 대에 이르러 다시 첫째집와 둘째집이 무후가 되어 셋째집으로 내려왔고, 그 분의 맏손자가 구암 한백겸이다.

물론 구암 당시에 종손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구암의 9대손인 유파(柳坡) 한경원(韓敬源, 系子)에 이르러 비로소 봉사손이 되었다. 종손의 말로는 근자에 문정공 한계희의 종손이 나타나 자신은 이제 제사만 받들고 있다고 했다.

종손은 밀양 박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병용(炳鎔·16), 병규(炳奎· 14), 병일(炳壹·10) 이다. 충남대 생물학과 출신인 종부는 봉제사에 더욱 헌신적인 태도를 보여, 선대 기일을 철저히 지켜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 또한 종손과 문중의 경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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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 한태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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