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운룡 1539년(중종34)-1601년(선조34) 본관은 풍산,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 시호는 문경(文敬)퇴계 문하의 대표적 도학자… 목민심서에도 오른 멸사봉공의 사표

겸암집
겸암 류운룡 선생은 관찰사를 지낸 후 영의정에 추증된 풍산부원군 류중영의 맏아들로 안동 하회마을에서 태어났다. 총명함과 우애 그리고 효성을 타고난 그는 16세 때(1554년) 퇴계 선생의 문하에 나아갔다.

이때의 문자가 '수선부급(首先負笈) 등문청업(登門請業)'이다. '가장 먼저 책을 짊어지고 문하로 나아가 학문을 청했다'는 의미다. 이는 연보에 나오는 글로, 당시에 폭넓게 인정된 내용이다.

문중에서는 '수선(首先)'이라는 문자에 자긍이 있다. '아직 아무도 문하에 나가지 않았을 때 우리 겸암 선조께서 처음으로 나아가시자 비로소 다른 제자들이 수업을 하러 모여들었다'고까지 해석하기도 한다.

여하간 겸암은 퇴계 문도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급문(及門)해 아주 오랜 기간 선생으로부터 깊이 있는 학문을 전수한 대표적 제자임에는 틀림없다.

퇴계 선생은 1567년(명종22) 봄에 겸암이 정자를 지었다는 소식을 듣자 "군이 새 정자를 지었다는데 내가 가서 함께 공부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네"라는 시와 함께 주역의 겸괘(謙卦)에서 딴 겸암정(謙菴亭)이라는 현판을 손수 써서 내렸고 이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퇴계는 "뜻이 비범하고 향학심이 대단해 참으로 얻기 어려운 사람이다"라고 칭찬했고,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류운룡이 병이 들었다니 걱정이다(柳雲龍病 可慮)'라고 적었다.

사제 간에 신기상통(神氣相通)한 모습이다. 이때 작성되었을 '강의 노트'가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류운룡 친필

겸암은 본래 벼슬살이를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부친과 스승의 명으로 어쩔 수없이 선조5년(34세)에 음사(蔭仕)로 전함사 별좌가 된다. 이때 퇴계 문하의 대표적 산림처사인 송암 권호문은 농으로 '그대마저 벼슬길로 달려가니(君亦走紅塵)/ 이곳 재야에는 이제 사람이 없네(林下無可人)'라고 아쉬워했다.

학자로서의 면모는 그가 퇴계 학단의 숙원 사업이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편찬에 깊이 관여하고, 퇴계 선생 사후에는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과 계몽전의(啓蒙傳疑) 교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점에서 드러나는데, 40세 이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문장가로서의 위상은 43세 때(선조14) 강상(綱常)의 죄를 범해 혁파된 안동부의 복호(復號, 안동부로의 환원)를 청하는 상소문을 지었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음직으로 벼슬을 시작한 이래 뜻하지 않았지만 진보현감, 인동현감, 한성부 판관, 풍기군수, 원주목사 직 등을 맡았다. 특히 지방 직인 고을 수령 재임 때는 임진왜란 전후 피폐한 민생 회복에 헌신해 많은 치적을 남겼다. 지금도 인동현감 옛터에 가면 선정비가 남아 있어 이를 말해준다.

인동현감(지금의 경북 구미시 동부지역)으로 있으면서 야은 길재 선생을 기념한 것도 인상적이다. 그는 1584년 (선조17, 46세)에 인동현감이 되어 고려 충신인 야은 선생에 대한 추모와 현양 사업에 착수했다.

3년간에 걸쳐 야은을 배향한 오산서원(吳山書院)의 공사를 마친 뒤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라는 기념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도록 했다. 지주중류비는 앞면에 중국 백이숙제의 묘우 앞에 있는 대자 탁본 글씨를 모해서 새겼고, 그 뒷면에는 아우인 서애 류성룡에게 전후 사실을 적은 글을 적었다.

이 모든 사업은 땅에 떨어진 절의의 정신을 야은 선생을 매개로 선양하기 위함이었다. 이 비는 조선 시대에 줄곧 주요 사적지로 자리매김되었다.

1587년 비를 세운 후 40여 년이 흐른 1634년(인조12)에 당시 28세였던 우암 송시열은 동춘당 송준길과 함께 이 기념비를 찾아 비문을 읽은 뒤 당시 최고의 학자였던 여헌 장현광 선생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구미시 오태동에 남아 우뚝한 이 비석을 대하면 선생이 비를 수립한 의도를 오늘날에도 되새겨봄직하다.

인동현감으로서 7년간의 치적은 다산 정약용이 편찬한 목민심서 호전(戶典)에까지 올라 있을 정도다.

화천서원

비를 세웠을 당시 34세였던 여헌 장현광은 5언 장편으로 고을을 떠나는 15년 선배인 겸암을 위해 시를 지었다. 시에서 여헌은 겸암의 학문 연원을 밝힌 뒤 지주중류비를 세운 공과 아울러 업적에 대해 기려 마지않았다.

백성들 날마다 어루만져 편안케 하였고(黎庶日撫摩)

군사와 국방의 일 부지런히 살폈지.(軍兵勤施設)

인동현감 재임 시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그런데 겸암이 영남의 작은 고을에서 군사 시설을 열심히 점검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야사에 의하면 겸암은 서애가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할 때 여러 계책을 맞춤형으로 준비해주었다 한다. 그래서인지 서애 선생의 문집을 보면 국방 분야의 다양한 정책과 전략이 두드러지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풍기군수로 있을 때는 험준한 산악에서 혼란기를 틈해 발호한 도적들을 제압해 인근 고을까지 안도하게 했다. 그 뒤 원주목사가 되어 올렸던 군국편의소(軍國便宜疏)에서는 겸암의 탁월했던 경세제민 역량을 엿볼 수 있다.

고결하고 겸허하며 온후한 인간상을 이 땅에 부식했던 선생에게도 감내하기 힘든 혹평이 가해진 적이 있었다. 실록 세주(細註: 본문에 대해 부연 설명한 내용)에 보면, 예조판서로 홍진(洪進)을 임명한 장면에서 겸암에 대해 적은 내용이 있다.

홍진은 아무 능력도 없는 류운룡을 단지 류성룡의 연줄이라 해서 잘 보이기 위해 여러 차례 승진 대상자 명단에 넣으면서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다고 했다. 이는 파당으로 왜곡된 시각에서 쓴 사료(史料)임에 분명하다.

선생은 사후인 숙종34년(1708)에 경북 풍기 고을에 있었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그리고 정조10년(1786)에는 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花川書院)에 각각 위패를 봉안했다가 고종 때 훼철되었다.

그러나 은 근자에 유림에 의해 복설되어 춘추로 향사를 받들고 있다. 묘소는 몇 차례의 이장 끝에 현재 마을 뒷산인 화산(花山) 기슭에 모셔져 있다.

1803년에 초간된 문집은 6권 4책으로 남아 있다. 책머리에는 눌은 이광정이 쓴 서문과 1803년에 쓴 입재 정종로의 중간 서문이 있고 책 말미에는 학사 김응조와 종손자인 졸재 류원지의 발문이 실려 있다. 연보는 사위며 제자인 성극당 김홍미가 썼고 묘지문은 아우인 서애 류성룡이, 묘갈명은 택당 이식이 지었다.

다음 호엔 고령 박씨(高靈 朴氏)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종가를 싣습니다.

사진제공= 나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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