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이란 일정한 특징을 지닌 하나의 집합체이다. 어느 민족이건 민족으로서의 기본적인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민족은 선후의 차이가 있고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가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쌓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민족에 작용하는 힘이나 압력,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노력이 공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세계화 시대의 역사의식은 안으로 민족 주체성을 견지하되, 밖으로는 외부 세계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개방적 민족주의에 기초해야 한다.

내 것만이 최고라는 배타적 민족주의도, 내 것을 버리고 무조건 외래의 문화만 추종하는 것도 모두 세계화 시대에는 버려야 할 닫힌 사고이다.

-교육인적자원부, 『고등학교 국사』

“우리는 이탈리아를 만들었으나, 이제는 이탈리아인을 만들 차례이다.” 이는 새로이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이 처음 회합을 가졌을 때 마시모 다젤리오(Massimo d’Azelio)가 한 발언이다.

이 인용구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것이 민족주의의 신화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 말 속에는 민족국가가 민족에 선행한다는 입장이 들어있다. 즉, 민족이 있고 국가가 생긴 것이 아니라, 국가가 생기고 난 후에야 민족이 생겨났다는 말이다.

단일한 민족 그리고 단일한 문화를 강조해온 우리의 풍토에서는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 민족은 ~하다 혹은 ~했다”라는 역사 서술에서는 민족이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민족이 역사의 주체 혹은 주체적 단위로서 가정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젤리오처럼 국가가 민족에 선행한다고 본다면 ‘근대적인 국가 이전의 역사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가령 “우리 민족이 역경과 고난을 딛고 마침내 국가를 만들기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역사의 주체는 민족이 되겠지만, 이에 반해 국가가 민족에 선행한다고 하면 더 이상 민족은 근대국가 이전의 역사에 등장할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키면, 민족은 오래 전부터 실체로 존재해왔던 게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발명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수업시간에 이러한 이야기들을 학생들에게 해주면, ‘예상했던’ 강한 저항에 부딪힌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국사를 정규 교과목으로 처음 배우기 시작하는 중학교 시절부터 강한 민족의식을 갖게 되고,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생각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기회를 갖지 못한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수천 번도 넘게 들었을 테니 자연스럽게 한국은 단일민족국가이며,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떤 학생은 “선생님이나 그렇게 생각하세요”라며 쏘아 붙이기도 한다. 어린 학생들에게도 민족은 불가침의 성역인 것이다.

혹자는 ‘굳이 학생들의 ‘기특한’ 민족의식에 찬물을 끼얹으면서까지 가치관에 혼란을 줄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어쩌겠는가! 이미 많은 대학에서 민족주의와 민족에 대한 삐딱한 시선들을 다루는 논술문제를 출제해주었으니, ‘오냐, 너희들이 우리 민족의 미래다’라며 등 두드려주는 선생이야말로 논술에서는 무책임한 선생이 되는 것을.

대입 논술에서 다루고 있는 민족에 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된다. 첫째는 민족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논의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민족의 객관적 요소(혈통, 인종, 조상, 문화, 영토, 언어, 관습 등)를 바탕으로 민족이 오래 전부터 실체로 존재해 왔다고 주장한다(이를 ‘민족실체론’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반면에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근대화 과정의 부산물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민족 공동체에 귀속하고자 하는 주관적 의지이다(이를 ‘민족구성론’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특히 민족구성론의 입장에서는 자본주의적 국민(민족)국가의 형성 단계에서 시민계급(중상공업에 종사하던 부르주아)이 절대왕정의 신민들을 국민으로 동원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이용했다고 본다. 즉, 그 이전 시기에는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컨대 고조선 사람부터 현재의 한국인들을 모두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는 국사 교과서의 경우에는 민족실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반면,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서구 국민국가의 영향을 받은 개화기 지식인들에 의해서 도입된 것이라는 주장은 민족구성론에 가깝다.

처음에 인용한 다젤리오의 말 역시 민족구성론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구성론이라고 해서 민족의 객관적 요소라 불리는 것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 집단이나 모아서 민족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인종에다 다른 언어, 문화, 관습 등을 갖고 있는 집단들을 무작정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뭉뚱그리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유사한 속성을 지닌 집단들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간에는 유대감과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어야 한다.

거꾸로, 단지 같은 인종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민족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역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민족이 실체냐 아니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겠지만(만약 민족이 실체가 아니라면, 국사 교과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구성주의적 입장에서는 민족이 실체냐 아니냐보다 그것이 산출하는 효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전자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족 간 유전자의 차이가 거의 없다고 해도(유전적으로 보았을 때, 민족 간의 차이라는 건 미미하다), 또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imagined society)라 해도, 우리가 민족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은 허구적인 게 아니다. 민족이라는 개념의 허구성과 상관없이 민족이라는 개념은 실제적 효과를 산출한다.

문제는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민족을 만들어 냈으며, 민족 개념이 산출하는 효과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민족주의는 군사 정권시절부터 국가주의의 시녀 노릇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읽기에 따라서는 극우파의 맹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라고 강요한다. 국가에 대한 충성만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왜 민족에 대한 충성도 강요하는 걸까?

여기서 우리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을 목격한다. 또한 민족주의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국민을 통합할 수 없었던 군사정권의 이데올로기적 빈곤을 발견한다.

정당성 없는 군사정권에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대신 그들은 민족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다. 민족에 대한 충성이 곧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다. 왜? 대한민국은 단일민족국가이지 않은가!

민족에 대한 충성을 북돋아주기 위해서는 한민족은 위대한 민족이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이 때문에, 광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모두 한민족의 역사로 편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고조선, 고구려, 발해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또 고려 시대의 대몽항쟁에 참여했던 민중들이 정말로 ‘내 나라, 내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몽고군과 맞서 싸웠던 걸까?

만약 그들이 우리와 같은 민족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고, 단지 옆집의 순이, 내 친구 철수가 몽고군에게 살육 당하는 것에 분노하여,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몽고군에 맞선 것이라면? 민족에 대한 고정관념을 조금만 버리면 우리가 당연시 여기던 사실들에 대한 의문들이 폭포수처럼 흘러 내린다.

이런 점에서 국사 교과서는 학생들의 상상력에 자물쇠를 걸어두고 있다. 그러니 대학에서 민족주의와 관련된 문제를 낼 수밖에(이런 문제들은 학생들에게 ‘너희는 자물쇠를 열었느냐?’고 묻는 거다).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에 대해서 자랑할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이 과거 찬란했던 민족의 영광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또 민족주의에 기대지 않고서는 국민을 통합하는 것이 힘에 부치는 정권이 민족주의 전파에 열을 올리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는 사실도 자연스러워해야 할까? 하인즈 워드는 민족의 자랑이고, 조승희는 민족의 수치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학생들에게 “그래 너희는 민족의 자랑이 되거라!”라고 말해야 하는 건가?

TOPIA 논술 아카데미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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